[무휼의 세상 거꾸로 보기] 과하지욕(胯下之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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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휼의 세상 거꾸로 보기] 과하지욕(胯下之辱)

  • 승인 2017-01-20 00:03
  • 이완순 소설가이완순 소설가
진정 이게 나라인가 싶다. 이런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극심한 자괴감이 들어 가슴을 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믿을 게 없고, 눈을 씻고 봐도 믿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부글부글 화가 끓고 있는데 확인사살이나 하듯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재판에서 레킷벤키저 전 대표 존 리에게 혐의를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 고통을 키웠다.

법은 역시 멀리 있었다. 이래서 젊은이들 사이에 개한민국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돈다. 대한민국은 권력을 위한 나라이며 재벌을 위한 나라, 기득권을 지켜주는 나라이다. 무능과 불통의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다.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면 지옥의 삶이 계속되고 대한민국이 사라질 수도 있다.

법치주의를 강조할 게 아니라 허점이 없는 법을 제정해 ‘법미꾸라지’들이 설치지 못하게 하고, 국민의 가슴에 정의를 바탕으로 한 절개와 지조를 심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 나라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 엄마가 병상에 있던 아들을 그리며 스케치북에 그린,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 ⓒ환경보건시민센터
▲ 엄마가 병상에 있던 아들을 그리며 스케치북에 그린,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 ⓒ환경보건시민센터

옥시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건 십년 전이다. 2006년 봄 한 어린이가 호흡기에 의지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구토와 고열, 호흡곤란으로 이어졌고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고, 그 해에 똑같은 증세로 7명의 아이가 죽었다. 2011년 한 임산부가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이미 입원해 있는 임산부와 똑같이 폐가 굳어 있었다. 5월 이후에 산모 다섯 명이 같은 증상으로 사망하자 대학병원측이 질병관리본부에 문의했고 보건당국이 역학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2011년 8월에 가습기살균제가 폐 손상의 위험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으나 1년이 지난 2012년 9월에서야 가습기살균제 전수조사에 착수해 2014년 3월에 피해사례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가의 책임이 위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재빨리 조사에 착수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안정성여부에 관심을 두고 철저히 확인했다면 사건의 확대를 막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텐데 안전성검증을 경시해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피해자들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상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징벌적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지만 피의자에게 살인죄와 사기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 못마땅하다. 2016년 9월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서 영국 레킷벤키저 본사가 한국의 가습기살균제 참사사태에 책임을 지라는 권고안을 발표할 만큼 위중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업무상과실치사상과 표시광고 공정화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신현우 전 옥시 레킷벤키저 대표에게도 업무상과실치사 죄로 5년, 표시광고법 위반죄로 2년, 고작 7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사장은 회사에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 책임져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들이 원인도 모른 채 고통을 받다가 사망하거나 중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할 처지에 있으니 가습기살균제가 피해자들의 폐질환을 유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조사가 제품을 출시하면서 제대로 된 안전성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나 살인미수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환경운동연합
▲ ⓒ환경운동연합

재판부가 과학적 근거 없이 강한 흡입독성이 있는 농도를 권장 사용량으로 설정했고, ‘정기적으로 환기하라’, ‘밀폐된 공간에서 장기간 사용하면 위험하다’ 등의 경고가 없었고, 제품자체에도 결함이 있어 통상 기대할 만한 안정성이 없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엄벌에 처할 수 있다. ‘아이에게 안심’이란 문구를 제품레벨에 사용한 것은 표시광고법 위반 차원이 아니라 사기죄를 적용해야한다.

논어에 이르기를 과하지욕이라 했다. 선비라면 죽을망정 가랑이 밑을 기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관료나 법조계는 모두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나 ‘법꾸라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의롭지 못한 회피만큼 치욕스런 일이 없으므로 잘못을 범했다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거나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건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버젓이 횡행하는 것도 법조인이 이중잣대로 돈과 권력에 빌붙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이처럼 썩어문드러진 나라는 없다. 지난 6일 중국 광명일보에 한국정치폐단의 원인이 ‘권력숭배문화전통’과 ‘무소불위의 권력형성이 용이한 봉건적 가신문화’라고 두 가지로 압축해 설명하는 기사가 났다. 적절한 질책이지만 차마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너무 추잡하고 변명의 여지없이 썩어문드러졌다.

국가가 국가로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국민들의 저항은 필수이다. 국민이 모두 일어나 조세거부와 불복종운동이라도 단행해 탐관오리를 다잡을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처참한 상황에서 민중이 나서지 않으면 그대로 또 당하고, 우리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

이완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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