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평 이순신연구가 |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1592년(임진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목적으로 참전했던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기, 1597년(정유년) 1월, 14만 명의 일본군이 또다시 침략해 시작된 정유재란으로 나눠진다. 전쟁과 강화협상, 다시 전쟁으로 이어진 7년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리더들은 전쟁 전이나, 전쟁 때나 강화협상기간이거나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나 바뀌지 않았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은 국가의 위기보다, 붕괴된 국가의 재건보다, 굶어죽고 칼에 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는 국민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몰두했다. 공론(公論)이 아닌 공론(空論)을 주장하면서 정파의 이익만 추구했다. 의병장 김덕령을 반역죄로 처벌했고, 의병장 곽재우를 의심했고, 전쟁에 참전해 공로를 세운 사람들의 훈장을 박탈했다.
일본군의 재침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서울의 책상에 앉아서 붓으로 전략을 결정하며 불패의 조선 수군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려 했다. 임금은 조선의 구원자와 같았던 이순신의 공로와 능력에 시기했고, 그를 헐뜯는 말에 기울였다. 각 정파의 리더들은 역린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진실에 눈을 감았고, 사실을 보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언론과 같은 사간원, 지금의 사법부와 같은 사헌부도 부화뇌동하며 이순신을 탄핵했다. 정유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백성과 군사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슬 퍼런 임금 앞에 모두들 눈치만 보았다. 칼날 위에 선 이순신은 당당했다.
하늘은 그런 그에게 조선을 구할 마지막 임무를 부여했고, 그는 계급장 없이 전쟁터를 향해 다시 떠났다. 7월,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던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사실상 전멸 당했다. 한반도의 남쪽 땅이라도 영구 지배하려는 일본군은 거침없었다. 눈에 보이는 우리 백성들을 모두 학살했다. 잔인함도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 땅의 남반부를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전쟁을 끝내려던 명나라는 그제야 허겁지겁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몰려왔다. 정유재란의 비극은 탐욕에 눈 먼 각국의 무능한 리더들이 빚어난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런 리더들과 달리 이 땅 조선을 지키는 신(神)과 백성들은 불의와 부정에 굴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나라를 외면하지 않았다. 불멸의 명장 이순신도 있었다. 애증관계였던 통제사 원균, 전쟁 초기부터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도 수군을 이끌었던 충청 수사 최호, 그들과 함께 칠천량에서 전사한 한 맺힌 혼령들이 있었다. 정유년 9월, 그들은 함께 유사 이래 가장 불가사의한 전투인 13척 대 133척의 명량대첩의 역사를 썼다. 420년 전 정유년은 '조선의 신(神)'과 세계적인 명장 이순신, 그리고 5천 년을 살아남은 위대한 백성이 함께 기적을 만든 해이다.
내년 2017년 정유년은 대한민국의 최고 리더를 뽑는 해이다. 백성과 함께 명량의 위대한 승리를 만든 이순신과 같은 리더를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눈에 불을 켜고 눈 밝게 뽑았으면 좋겠다. 이순신은 최악의 위기의 순간에 말했다. “지금 신(臣)에게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으로 막고 싸운다면, 즉 오히려 할 수 있습니다. …… 신(臣)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이 증명했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심(私心)이 아니라 공심(公心)으로, 특정 집단과 이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참된 리더를 뽑았으면 좋겠다.
박종평 이순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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