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취업과 진로 이야기 끝에 4년의 대학생활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학생들은 이내 신입생 때의 낯설음과 어설픔, 갈등, 친구, 방황, 공부, 변화와 성장 등을 이야기 했다. 크게 변하지 않은 학생도 있지만 교수가 보기에도 두드러지게 달라진 학생들의 공통점은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왜 그렇게 게을렀는지 등 눈물까지 글썽해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학생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교수로서 제대로 도와주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늘 그러곤 한다. 한 해가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일들을 뒤돌아보게 되고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이나 잘못한 일을 반성하곤 한다. 그래야 다음의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정연복 시인은 그의 시 '겨울의 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겨울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다보면/ 겨울의 일이/ 무엇인지 깨우칠 수 있다./ 생명의 본질만 남기고/ 군더더기는 말끔히 없앨 것/ 춥다고 움츠려들지 말고/ 당당한 자세로 우뚝 설 것/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말고/ 내면으로 묵묵히 생명을 기를 것./ 이 세 가지만 충실히 하면/ 긴긴 겨울을 견딜 수 있으리/ 고통과 시련 너머/ 꽃 피는 봄날 맞이할 수 있으리.”
이 겨울, 온 나라가 국정농단으로 충격 받고 부끄러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설마했던 일들이 사실로 밝혀지고,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데 기가 막히고 있다. 매스컴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한다. 얼마나 가리고 있었는지, 어디까지 파고들어야 숨겨져 있던 것들이 다 드러날 것인지.
그래 한바탕 떨구어보자.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이 계절 겨울나무들 마냥 달려 있던 잎사귀들을 모두 떨군 채 속 모양 그대로 한번 드러나 보자. 모르고 살아온 무지의 잎, 바쁜 세상살이에 밀어둔 무관심의 잎, 짐작하면서도 덮어둔 채 자기 속만 채운 이기심의 잎, 알면서 피해버린 무책임의 잎, 보복이 두려워 입다물어버린 좌절의 잎, 죄를 덮어준 비양심의 잎 등. 이 겨울 찬바람에 죄다 떨어뜨려 보자. 오늘의 현실인 민낯을 숨기지 말아보자. 그래야 어느 가지가 썩었는지, 어느 가지 때문에 새 잎부터 뒤틀어져 나오는지, 왜 한쪽으로 기우는지 알지 않겠는가. 잘라버릴 가지를 제대로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이 자존심의 촛불을 들고 거리를 메우고 있다.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려는 마음으로, 촛불을 무시한다면 횃불이라도 들겠다는 결연함까지 다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을 믿고 걸핏하면 '국민 타령'을 했던 정치가들에게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춥다고 움츠려들지 않고 당당하게 우뚝 선 겨울 나무처럼 우리의 바램을 외친다, 어른도 아이도.
누구는 팻말을 들고, 누구는 노래를 부르며, 누구는 구호를 선창하고, 누구는 뒷정리를 맡아하며 도도한 흐름을 키워나간다. 크고 작은 단체나 개인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어우러지는 촛불 집회의 질서는 점차 자연을 닮아가는 듯하다. 그런데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겪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우리 국민은 지금 힘을 키우고 있다.
부정부패로 상처나고 사리사욕으로 처참해진 오늘의 모습에 속속들이 주눅들지는 말자. 작은 원칙을 지키느라 마음 쓰며 살아온 우리의 시간들을 너무 억울해 하지 말자. 임시방편으로 끊임없이 바뀌는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가지 말자. 무너지지 않는 기본이 우리를 지키는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하자. 부끄러움을 아는 깨달음이 우리를 받쳐주는 사회가 되도록 살아보자.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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