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낙준 모세 주교 (성공회 대전교구장) |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정작 필요한 것이 아닌 헛된 고민만 하였을까?',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왜 혼자할 수 있다고 했을까?', '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진 사람을 진심으로 껴안았던 적이 생각이 안나는 이유가 어디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할 시간도 없이 산 나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산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괴물로 사는 것도 모른채 살았다 여기니 부끄러움이 제 속에 가득찼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길을 못찾아 방황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망가진 괴로운 인생길을 걸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부정직한 지식인들의 행태들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보고서를 쓴 서울 유명 대학 교수, 많은 이들이 이미 죽은 원인을 아는데도 이를 왜곡하여 발표한 서울 유명한 의대 교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권력으로서 잘못을 정당화하는 고위 공무원들의 모습들. 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지도자를 보면서 제대로 배운 가르침을 행했다면 지식인이 갖는 정직한 당당함을 이토록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하 수상하여 그 모습을 깊이 보다 보니 그 속에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인간은 먼저 부모의 가르침에 의해서 어리석은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나아갑니다. 부모의 가르침은 성숙으로의 이동에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된 가르침을 경험한다면 타인에게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하늘에 계신 하느님조차도 기뻐하실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부모의 가르침이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에 기반한 가르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 위의 선조들, 그 위로 조선시대의 선비의 가르침이라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 고유의 덕목과 선비정신이 무너졌고 미국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강력한 영향 하에 물질에 대한 욕심에 기초한 이기심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조차 때로는 이기심에 축복이라는 옷을 입혀 인간을 유혹하면서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 종교는 사람들에게 참된 인성을 강조하고 지키도록 가르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이러한 큰 가르침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가족안에서조차 물질에 대한 이기심을 삶의 최고 가치로 보는 것으로 변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가장 큰 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말같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헌신적이고 관용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세대 간의 차이를 넘어 소통하고자 할 때, 젊은이와 노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사회가 노인을 뭔가 무력한 존재, 뭔가 결핍되어 있어 국가가 지속적으로 어떤 혜택을 공급해 줘야 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노인은 노(No)인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요양원사업 등 노인돌봄사업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노인을 젊은이들보다 삶의 경험이 더욱 많은 지혜자인 노(Know)인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뭔가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요양사업이 아니라 지역사회공동체의 자원이자 리더들로서의 노인들이 활동하는 지역공동체센터 사업이 더 우선시 될 것입니다.
작금의 현실에서 물질에 대한 욕망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나아가 국가 전체를 망가뜨린 현상을 목도하는 중입니다. 이 현실에서 다시 한번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사랑이 이뤄지며, 사랑으로 인한 연대가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치이자 모든 인류가 지향하는 참 가치는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며, 이 희망으로 우리는 오늘의 어려움을 인내하고 내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유낙준 모세 주교 (성공회 대전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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