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출처=위키백과 |
[불의(不義)의 시대, 불평등(不平等)의 시대, 불만(不滿)과 불신(不信)으로 가득한 시대]
몇 주 전 화면 가득 선명하게 차지하고 있는 글자와 한 연기자의 대사가 가슴깊이 파고 들어오는 드라마가 있었다.
까만 화면에 하얀 글자로 선명하게 쓰여 있는 문구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시작된 드라마는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이 응급실에 급하게 실려 들어온다. 하지만 돈 많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진료 순서가 밀려 목숨을 잃게 된다. 그에 분노한 어린 아들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와 “우리 아버지가 먼저 왔었단 말이에요”라고 울부짖으며 병원의 부당한 행위에 불만을 터트린다.
그 때 홀연히 나타난 의사 한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 어린 아들을 제압하고 기물을 파손하다 다친 부위를 치료해 주며 이렇게 말을 한다.
“다 깨부수고 나니까 속이 좀 후련하냐? 야구 방망이 같은 거 백날 휘둘러 봤자 그 사람들은 너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 할 걸. 진짜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면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라. 분노 말고 실력으로 되갚아 주라고.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때 그 어린 아들은 이런 말을 나지막이 되풀이한다. ”그런 걸 어떻게 하냐고? 나 같은 게… 나 같은 게…“
그렇다. 지금 이런 시국에 불만이 있다고 나 같은 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내 말 한 마디에 여러 사람들이 들썩들썩할 만한 영향력 있는 사람도, 잘못을 하고 있는 이에게 직접 잘못을 책망할 위치에 있지도 않은 내가.
하지만 요즘은 페이스북이나 유트브 같은 곳에서 나의 의견과 생각을 당당히 알릴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나의 글과 영상이 시민 정치 참여라는 명목으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도 하고 또한 그와 반대로 사회적 혼란을 유발한다든가 또는 내 의도와는 달리 다른 엉뚱한 단체들에게 잘못 이용당하다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12일과 19일에 있었던 촛불시위는 예전과 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이 모여 집회의 열기는 뜨거웠으나 토론과 공연 등이 어우러진 축제 같은 이성적인 새로운 시위문화를 보여주었다. 대통령에게 주최측 100만 명이라는 우리의 소신을 보여 준 큰 행사이기도 했다.
또한 경찰차에 올라가는 등 경찰에게 폭력으로 행사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비폭력시위’를 외치며, 과격행동을 만류하고 평화시위로 이끄는 사람들이 있었고, 시위 후 쓰레기를 자진 수거하는 등 청소까지 깨끗이 마무리 하는 국민들의 모습은 예전 화염병을 던지고 의경들에게 폭력으로 맞서던 모습과 달리 우리 국민들의 높아진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대통령에게 평화롭게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또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세계에 알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것은 실제로 같은 시기에 사망자까지 발생한 폭력적인 미국의 트럼프 당선 반대 시위와 대조되는 평화로운 대규모 시위였다고 여러 외신들은 상세보도 했다. 대통령의 잘못으로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이런 국민들의 모습으로 조금은 덮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변화된 시위문화는 국민 한 사람한 사람의 변화된 의식이 모여 만들어진 결정체라 생각한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 묘지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평범한 묘비가 있다. 그 평범한 묘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묘비를 제치고 유명해진 것은 묘비에 쓰여 있는 감동적인 문구 때문이다. 실제로 넬슨 만델라도 이 묘비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세계를 바꿀 방법을 찾아냈고 그 덕분에 폭력으로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그는 먼저 잘못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생각까지 변화시킨 뒤, 수십 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통해 나라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도, 민족도, 주변 사람들도 아닌 자기 자신부터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부터 그 문구를 읊조리며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깨달음을 얻어 본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상상력에 한계가 없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게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했을지!
ㅡ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의 묘비문 ㅡ
김소영(태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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