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동아방송예술대의 학생들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 대목을 번안해 비장하게 부릅니다. '성난 민중의 노래'입니다. 유튜브 조회수가 10만을 넘겼습니다. “소름돋는다”, “멋지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말들이 동영상에 댓글로 달려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슈퍼스타K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정치적 혁명의 공간을 가벼운 딴따라 놀이로 치환하는 무례한 비유일까요. 그럴 리가요. 청년들의 정치참여 양상이 대학축제 분위기를 띈다는 분석은 제가 대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유의미한 세대론의 요소였습니다. 그 즈음 처음 시작된 촛불시위의 현장에는 운동권의 오래된 민중가요 대신 아이돌 댄스그룹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던 선배님들이 먼저 저희보고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라고 치켜세워주시지 않았던가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은 뮤지컬 쇼타임의 판타지입니다. 혁명은 정말로 아름다울까요. 영화를 통해 간접경험하는 혁명은 제게도 가슴벅찬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리얼 월드의 혁명은 대부분 고통과 상처와 광기로 점철됨을 왜 아무도 가르쳐주시지 않나요. 비겁하게 가만히 있자는 말로 들리시나요. 그러는 본인은 죽음을 불사하고 광장에 나가셨나 봅니다. 저는 어른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혁명을 온몸으로 감당한 옛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셨거나 말이 없습니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동경하는 선배님들은 누구보다 잘 먹고 잘 살면서 혁명의 낭만화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덕분에 우린 혁명의 실체를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성취감에 목마른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재능으로 꾸려진 발랄한 행진과 행사가 보기좋은 것과 별개로,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에는 아픈 만큼 성숙하는 책임감도 따라오지 않을 텐데요.
민중총궐기 해시태그를 찍어 셀카 인증샷으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도, 촛불 파도타기와 함성 속에서 두근두근 쾌감을 느끼는 것도, 그것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적어도 전쟁영화나 공포영화를 볼 때 상영관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있음을 망각할 수는 없듯, 안전하다는 암묵적 룰 안에서 자랑스러운 저항을 '즐기고' 있음을 피차 인정해야겠습니다.
무대에 오른 청년들의 눈빛을 다시 봅니다. '성난 민중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행복한 표정입니다. 다재다능하지만 그 재능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무기력한 젊음에게 필요한 건 매달의 지원금이 아니라, 이처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역할을 해볼 수 있는 경험의 기회입니다. 배곯는 이보단 자존감에 굶주린 청년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광화문 광장은 시민교육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특정 정치집단이 독점해 청년들을 액세서리나 앵무새 취급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좌우막론 마이크를 쥐고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넬라 판타지아든, 성난 민중의 노래든, 애국가든 마음을 모아 노래 불러 봅시다. 혼자서는 불이 잘 붙지 않는 양초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리하여 광화문 광장의 합창이 끝난 뒤, 심심하고 허허로운 제각각의 골방에 돌아온 후에도 '혼자 있어도 꺼지지 않을' 작고 든든한 촛불 하나씩 밝히셨기를 기도합니다.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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