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신 목 베임을 당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생사를 함께할 수 있는 벗이나 사귐을 뜻하는 이 말, 문경지교(刎頸之交)!
돌아가는 정국을 보며 이 고사가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때에는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장군이 있어 강국인 진(秦)나라도 감히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완벽귀조(完璧歸趙)’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인상여는 원래 천한 사람이었지만, 조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화씨벽(和氏璧)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오르게 되었다.
인상여가 상대부에 오르게 된 이야기 한번 들어보자.
진나라 왕이 조나라 혜문왕에게 면지(澠池)에서 만나 술 한 잔 하자고 요청했다. 조왕은 진나라가 두려워 회동에 응하고 싶지 않았으나 염파장군과 인상여의 권고로 응하게 되었다. 인상여가 수행했고, 염파장군은 국경까지 전송했다.
염파는 왕과 하직하며 말했다. “왕께서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빕니다. 거리를 계산해 볼 때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시기까지 30일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 3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면 태자를 왕위에 세워 진나라의 야망을 끊어 버리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진왕과 면지에서 만났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진왕이 말했다. “과인은 조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슬(瑟)을 연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왕이 슬을 연주하자 진나라의 어사(御史)가 앞으로 나와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과 만나 술을 마시며 조왕에게 슬을 타게 했다”고 기록했다. 진나라왕의 명령에 따른 셈이다. 이를 본 인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우리 주군께서도 진왕께서 진나라 음악에 능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청컨대 분부(盆缻)를 연주하여 서로가 즐기도록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노여워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인상여는 분부를 받쳐 들고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진왕에게 청했다. 그래도 청을 듣지 앉자 인상여는 “대왕과 신의 거리는 다섯 걸음도 안 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대왕의 목숨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인상여의 협박에 좌우의 사람들이 인상여를 칼로 치려다가 인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모두 뒤로 물러났다. 진왕은 마지못해 부를 한 차례 두들겼다. 인상여는 조나라의 어사를 불러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위해 부를 쳤다”고 기록하게 했다.
진왕은 주석이 파할 때까지 조나라를 누를 수가 없었다. 인상여의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상여는 이 공로로 상경(上卿)이란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면지의 회동 후 인상여가 염파장군의 윗자리에 오르자 염파는 매우 불쾌했다.
“나는 조나라의 장군으로 전쟁에 큰 공이 있었다. 그런데 인상여는 겨우 입과 혀를 수고롭게 했을 뿐인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다. 게다가 상여는 본래 천한 출신이다. 부끄러워 도저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며 “인상여를 만나면 기필코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인상여는 조회 때마다 병을 칭하고 나가지 않았고, 외출을 했을 때 멀리 염파가 오는 것이 보이면 수레를 끌고 피해 숨어 버리곤 했다. 염파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다.
▲ 출처=다음 블로그'추나무랑' |
인상여의 하인들이 불평을 쏟아 놓았다.
“저희가 가족을 떠나 당신을 모시는 것은 당신의 높은 의기를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염파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그가 두려워 피해 숨으시며 심히 두려워하시니 이는 평범한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일이거늘 하물며 장군이나 재상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저희는 불초하여 떠나갈까 합니다.”
인상여가 이들을 만류하며 물었다. “그대들이 볼 때 염장군과 진왕 중 누가 더 무서운 사람인가?” “그야 진왕이 더 무섭지요.” “그런 진왕의 위엄을 상대하여 나는 궁정에서 그를 꾸짖고 그 신하들을 욕되게 했다. 내 비록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나 어찌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호시탐탐 우리를 엿보고 있는 강한 진나라가 감히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형세로 보아 둘 다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염장군을 피하는 것은 국가가 우선이기 때문이고 사사로운 원한을 뒤로 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가진 자들끼리 다투지 않는다는 것. 손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염파장군의 태도가 어뗐을까?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이르러 사죄했다. “비천한 사람이 장군께서 이토록 관대한 줄을 알지 못했소. 머리를 숙이고 조아렸다. 결과는 어뗐을까? 문경지교(刎頸之交)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온다.
눈을 씻어보자. 왜냐구?
조선 팔도 어느 곳이든 이런 친구를 찾을 수 있나? 대권을 손에 쥘 때가 왔다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 대권을 쥐려는 이유가 국익 때문이겠는가?
한 마디 더. 최순실은 과연 박대통령에게 문경지교였을까?
주(註)
‘완벽귀조(完璧歸趙)’
벽옥이 온전히 조나라로 돌아가다. 물건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원래의 주인에게 온전하게 돌려준다는 뜻.
김용복 / 극작가: 칼럼니스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