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달에도 30도를 훌쩍 넘는 카파도키아의 오후. 그늘 한 점 없는 카파도키아를 돌아다니기엔 내 체력이 남아나지 않아 숙소로 돌아왔다. 스탭이 타 준 터키 차 ‘차이’를 마시며 숙소 개 에페스와 놀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1층 방을 쓰는 여자애들이 창문에 매달려 줄곧 담배를 피고 있다. 한두 번 눈이 마주치기에 살짝 웃었더니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바로 간단한 한국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 간단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터키친구들이었다.
왜 이 시간에 방에 있냐는 물었더니 멀리 앉아있던 가이드가 큰 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왜 가이드가 대신 대답을 해주는 거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들이 영어를 못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오후의 인연을 그렇게 끝났다.
밤에 테라스에 혼자 앉아 사진정리를 하는데 이 두 친구들이 과자를 사들고 들어왔다. 웃으면서 힐끗거리더니 같이 과자를 먹자고 다가왔다. 귀여운 이 친구들의 이름은 띠담과 딜라라. 이스탄불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는 16살의 어린 친구들이었다. 내가 갔던 시기가 터키의 명절이었고, 휴일을 맞아 이 친구들도 카파도키아로 휴가를 온 거였다. 나는 (낮부터 줄담배를 펴대던) 이 친구들의 어린나이에 놀랐고, 이 친구들은 나의 많은(?) 나이에 놀랐다.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며 얘기했다. 생각보다 얘기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나는 친구들에게 한복열쇠고리와 팩을 줬고, 친구들은 각각 자신들의 애장품이라는 반지와 목걸이를 선물해줬다. 그리고 다음날 같이 석양을 보고 술 마시러 가자고 눈을 찡긋했다.
터키 사람들은 담배를 정말 많이 폈다. 아기 엄마들은 아기를 안고도 담배를 폈고 한국과 담배 가격이 비슷했는데 물가가 훨씬 저렴한 터키물가에 비해선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담배인심이 좋았다. 이 친구들도 거의 줄담배를 피워댔는데 연신 나에게 웃으면서 담배를 권했다. 흡연자라면 나도 어울려 터키담배 맛 좀 느껴봤겠지만 담뱃재를 어떻게 터는지도 모르는 비흡연자였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투어를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생각보다 투어가 늦게 끝났다.
“애들이 아까부터 너 기다리고 있었어.”
테라스에 앉아있던 스탭이 알려주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띠담과 딜라라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크하자마자 아이들은 “민용!” 하면서 반겨줬다. 어제 만났는데 너무 친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외로울 수 있는 여행이었는데 시작부터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외로울 새가 없는 것 같았다.
딜라라랑 띠담이 석양보고 하맘(hamam, 목욕탕)을 가잔다.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은 뜨거운 지짐돌에 몸을 지지는 곳이다. 한국 목욕탕처럼 나체는 아니지만 뜨겁게 몸을 지지는 문화는 비슷했다. 아토피가 있는 나는 온몸이 상처투성이라 누구 앞에서 몸 드러내는 걸 꺼렸다. 피부트러블이 있어서 안 된다고 거절하고 석양을 보러갔다. 카파도키아의 석양은 너무 멋졌다. 삐쭉삐쭉 고깔모자같은 암석들 사이로 붉은 빛이 뿌려졌다. 석양이 진 후는 더 멋졌다. 석회암지대 너머로 붉은 해가 사라지자 어둠이 드리웠다. 그러자 동굴사이사이 위치한 건물들에 불이 켜지면서 놀라운 야경이 펼쳐졌다. 한참이나 전망대에 앉아서 카파도키아의 저녁을 구경했다.
띠담은 자기친구에게 전화해서 한참이나 한국인 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를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아해 주니깐 기분이 묘했다. 자기 친구랑 통화해줄 수 있냐는 부탁에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기왕 할거면 영상통화를 하자고 했고, 띠담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핸드폰 너머로 처음 보는 띠담의 친구는 나랑 통화한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러워하고 행복해 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시선으로 서양인들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했다.
띠담과 딜라라는 동네 펍으로 데려갔다. 뭐가 뭔지 몰라 주문도 못하는 나대신 터키의 유명 음식을 주문해줬다. 흔히 우리가 흥미를 가지는 얘기를 했다.
띠담과 딜라라가 데려간 펍은 라이브 펍이었고, 누군가의 생일 파티로 인해서 흥이 한껏 달아올라있었다. 터키사람들의 흥은 대단했다. 사실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끼어 있는 터키였다. 고작 3% 유럽대륙에 속한 터키를 유럽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인드는 누가 봐도 유럽인들이었다. 다른 이들 눈치 안보고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표출했다. 물론 이슬람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애정표현이 자유분방하진 안았다. 애정표현을 제외한 대부분은 매우 솔직하게 표현했고, 여유로웠다. 그리고 유흥문화는 확실히 한국스타일이 섞여있었다. 한국다운 정(情)이 있었고, 유럽다운 자유분방함이 있다. 애들과 번역기로 열심히 대화를 하는데 처음 듣는 터키 가요는 내 귀에 쏙쏙 박혔다. 노래가 마음에 들었고 나는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가서 춤추자!”
띠담이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야 안 돼. 난 못 춰.”
“왜? 쉬워. 지금 네가 앉아서 추는 듯이만 하면 돼.”
“아니야. 난 못해”
한국에서도 이런 유흥문화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 내가 터키까지 와서 춤추기가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띠담은 거의 5분 넘게 지치지도 않고 같이 나가자고 그랬고, 더 이상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술기운을 빌리기로 했다.
라이브 연주중인 기타연주자들의 미소가 자신감을 심어줬다. 띠담과 딜라라는 옆에서 터키 춤을 알려줬다. 터키 사람들 사이에 낀 한국인이 재밌었는지 보컬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한국에서 온 여자애래! 얘 주인공으로 하자!”
열심히 춤을 추는 나를 보컬이 무대 가운데로 몰아줬다. 생일 주인공이었던 친구도 웃으면서 무대를 양보했다.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오늘도 역시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이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없었으리라./전민영 미디어아카데미 명예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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