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내부는 크게 바티칸 미술관, 시스티나 소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나눌 수 있다. 간단한 짐 검사를 마치고 들어가자마자 이어지는 건 시대와 종류별로 나눠진 작품전시관이다. 때문에 국가보다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아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00등 유명 ㅏ00듸 예술품과 전시품을 가득 안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작은 국가에 매일 같이 수천 명의 인파가 몰리는 이유다.
바티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피에타상, 아폴로상, 라오콘 군상, 아테네학당 등 교과서에나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이 쉽게 눈에 띈다. 특히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두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바티칸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율리우스2세 교황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그린 천지창조와 존경하는 99의 부탁으로 60세라는 나이에 그린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위해 프레스코화를 처음 시도한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4년 만에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하지 만 이 작품은 공개와 동시에 극찬을 받는데, 특히 ‘아담의 창조’는 숨을 불어 넣는 장면을 손가락을 맞대는 것으로 표현한 ‘아담의 창조’는 손에 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존경하던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천지창조 때문에 시스티나 성당이라면 치가 떨릴 텐데 미켈란젤로는 다시 이 곳으로 들어온다. 그는 그리고자 하는 어떤 게 확고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만들어진 최후의 심판. 당시는 젊은 예수, 요염한 자세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제자 및 인물들이 모두 나체라는 이유로 신앙모독이라 평가됐다. 당시 종교와 예술이 모두 타락과 혼란의 시기를 겼었다. 미켈란젤로는 종교에 대한 신념, 예술에 대한 신념을 평생 지니며 살았는데 이 두 신념이 모두 흔들렸던 것이다. 당시 그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으리라.
누군가는 가슴이 벅찰 정도의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유명한 그림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설렘은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울릴만한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이게 그 유명한, TV에서 보고 책에서 보던 천지창조라는 생각에 신기한 정도였다. 여행을 다니면서 종종 느꼈지만 바티칸에서 더 심하게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내가 종교인이었다면, 특히 크리스천이었다면 유럽을 조금은 다르게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사방에 놓인 게 종교의 산물이었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만약 내가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베드로의 상징인 열쇠와 교황의 상징인 교황관으로 이뤄진 바티칸 국기도, 베드로의 죽음이 얽힌 성 베드로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나는 글로 써진 자료를 읽고 머리로 이해한다. 만약 내게 신앙이 스며들어 있다면 다른 감정을 느꼈을 테니까. /전민영 미디어아카데미명예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작성됐습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