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아티언스 대전의 영화 상영 행사 프로그램인‘위대한 상상 : 영화가 바라본 과학’안내자료 |
어릴 적 아버지의 책꽂이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계몽사 명작동화나 계림출판사 문고, 어깨동무 같은 월간지가 꽂혀있던 우리 책꽂이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갈색 그 책꽂이 안에는 일엽 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 ‘화엄경’ 같은 불교서적들과 함께 헤세의 ‘데미안’부터 ‘설국’같은 일본 책까지 소설들이 빼곡했다.
눈에 띄는 대로 뽑아들며 뜻도 모른 체 읽었던 그 많은 책들은 소읍에 사는 내게 문학적 상상력과 함께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 국문학도셨지만 문학과는 거리가 먼 공직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기분 좋게 술에 취하시면 우리들을 앉혀놓고 문학이나 세상 이야기 등을 풀어 놓으셨다.
나는 술주정 같은 그 이야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유전자 안에 들어 있을 문학에 대한 갈망이,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망이 불쑥 솟아오르곤 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책들과 아버지가 보여 주셨던 문학도로서의 낭만이 있었던 환경은 어느 새 나의 자양분이 되었고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다. 세상의 잣대로 볼 때 모자라고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도, 아무리 작은 보잘 것 없는 일들을 하게 될 때에도 그 힘이 기둥이 되어 누구보다 당당하게 설 수 있었다.
얼마 전 아티언스 대전을 관람했다. 중앙로 구석구석 골목길을 누비며, 문화공간들을 찾아가 전시회도 보고 연극도 보았다. 거기엔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낯설고도 신기한 세상이 있었다.
아트와 사이언스를 결합하려는 다섯 명의 작가들이 예술을 과학으로 풀어 놓으며 각각 자기만의 방식대로 빛으로, 사진으로, 소리로 새로운 세상을 선보이고 있었다. 인체실험을 통해 측정된 스트레스 치수가 고운 색으로 변해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 이안’을 거쳐 ‘쌍리 갤러리’로 가보니 디지털 사진 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곳곳에서 시간과 기억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스페이스 파킹’에서는 우리 몸 속 세포에서 뽑은 데이터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과 소리로 재현되고 있었으며, ‘현대 갤러리’와 ‘중구 문화원’에서는 디지털 기술과 나노 현미경으로 본 세상이 그 어떤 디자인이나 영상보다도 더 실감나게 펼쳐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아티언스 대전의 연극 '사요나라' 중 한장면 |
또 아티언스에서 준비한 연극인 ‘사요나라’와 ‘일하는 나’는 한 시간 안에 로봇이 등장하는 연극 두 편을 올리며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무대를 선보였다. 갈수록 감정을 잃고 기계화 되어 가는 인간과 점점 진화해 인간보다 더 감성이 발달된 로봇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병 들어 죽어가는 여인에게 시를 읽어 주던 로봇의 음성은 그 여운이 아주 오래도록 남았었다.
아티언스 대전 행사를 다니면서 중앙로를 헤매 다니던 나는 문득 어릴 적 호기심으로 마주했던 아버지의 책꽂이를 떠올리게 됐다. 빼곡히 들어차 있는 책들을 뽑아 읽는 것처럼 중앙로 골목 골목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문화공간들을 들르면서 그 속에서 설레임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감동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권 씩 책을 펼쳐 볼 때 마다 다가왔던 새로움들이 거기 아티언스 대전이 열리는 갤러리에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고 있는 중앙로의 골목. 그 안이 늘 이렇게 새로운 시도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와 여러 장르가 결합해진 볼거리로 가득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어느 도시에도 없는 훌륭한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전에서는 어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과학 인재와 연구단지라는 자원이 있으니 불가능 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자원과 능력을 우리가 사는 이 곳에 풀어 놓는다면, 그래서 예술의 향기에 젖고 과학의 빛에 환히 눈 뜰 수 있다면, 우리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며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티언스 대전을 둘러보는 내내 과학의 도시 대전에서 과학과 여러 분야를 접목시킨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꿈 꿔 보게 되었다.
한소민 한밭문화마당 문화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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