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 刊 |
20대 혹은 30대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소설도, 마흔 아니 그 이상이 되어 다시 읽으면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나에게는 그런 책인 것 같다. 스스로를 나름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며 지적 허영심이 충만했던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하였고 그때는 제목이 '상실의 시대'였었다. 20페이지를 겨우 읽고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탄식을 하면서 책을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읽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끝까지 오기로 읽긴 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글자 판독만 한 경우라 사실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어떻게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진정한 사랑이나 청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이십대 초반 청년이 말이다. 이 소설이 민음사에서 원제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발간되었을 때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설레었고 다시 읽었을 때의 작품은 예전의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번역, 새로운 편집으로 작품을 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작업에 역점을 두었다고 한 출판사 리뷰처럼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을 한 듯하다. 번역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내가 20대 초반이 아니라 30대 중반(직장생활, 결혼 등을 경험한)이 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부분도 필시 있을 것 같다.
줄거리를 간략히 살며보면 와타나베는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우연히 듣고, 젊은 날을 회상한다. 어느 날 유서 없이 자살한 고교시절 친구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에 대한 기억.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지속적으로 만나며 대학생활을 보내게 되고 연극사 시간에 알게 된 적극적인 성격의 미도리와도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 있던 나오코가 자살을 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와타나베는 무작정 여행길에 오르게 되지만 나오코에 대한 상념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다. 얼마 후 나오코가 자살하던 날 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혼란에 쌓여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 미도리의 “어디 있어?”라는 질문에 와타나베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항상 그렇듯 성적 모티브 아래 숨겨진 결핍, 상실, 그리고 한 인간의 성장을 다룬다. 특히나 이 작품은 무라카미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더 강하게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무라카미식 소설의 축약판이다.
어느덧 기성세대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는 그러나 여전히 완벽한 이해를 하기에는 난해한 소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나오코의 애잔함과 그녀가 왜 정신분열까지 이르게 되고 자살을 택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공감이 가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다. 가슴 아릿함이 있다. 무의식적인 내면의 공감을 통해 나의 청춘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책일 것이다. 예전에는 감흥 없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 같은 전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독서하기 좋은 가을날에 20대에 읽었던 책을 다시 한 번 꺼내 볼 수 있는 여유를 찾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진용 유성구평생학습원 노은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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