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전 국무총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대통령이 비서진과 국무위원의 보좌를 받으면서 국정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최순실씨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이 사이비 종교 교주일가가 지배한 무속국가가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참담함은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이다. 대통령이 지난 10월 24일 개헌을 공론화한 것은 전경련을 앞세워 수백억원을 끌어 모은 최순실씨의 권력비리를 덮기 위한 국면전환용이었다.
상식적인 정치인이라면 권력비리를 덮고 넘어가려는 대통령의 정략을 비판하고 권력비리 단죄를 먼저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의 유불리 때문에 권력비리 단죄 요구는 후순위로 돌리고, 개헌논의에 화답하고 환호를 부르는 일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을 섬긴다는 정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더욱이 그들 중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앞장섰던 사람들도 있다. 정치적 불량품을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이라며 팔았던 정치인들은 잘못이 없을까? 정치인들의 행태가 참담함을 안겨준다.
개헌은 필요하다. 시대적 가치의 변화에 따라 헌법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의 헌법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장기집권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5년 단임으로 했다. 그런데 5년 단임제는 대통령에 당선만 되면 그만이라며 책임정치를 방기하게 하고,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권력비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게 많은 이의 평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치를 돌아보면, 각종 권력비리가 반복되고 민주주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단순히 제도에 있다고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권력비리 척결보다는 대통령의 개헌공론화에 환호하는 정치인들처럼 권력만을 탐한 정치인에 의해 현재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제도라도 개선하여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그래서 나는 개헌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이 개헌에 적기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서민들의 삶이 너무 힘들고, 희망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754조원에 이른다는 재벌 사내유보금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반면, 가계는 소득이 늘지 않아 빚으로 생활하면서 부채가 1275조원에 달하고, 경쟁력 약화로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늘어나 기존 일자리는 불안해지며, 신규 일자리는 창출되지 못하고 있다. 공단도로에 휘날리는 늘어만 가는 공장 매물 홍보 플래카드들, 이름을 외우기도 전에 바뀌는 동네 가게들은 서민들의 삶이 힘겨움을 보여준다. '내일은 어떻게 되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버티고 있다. 이러한 서민들의 삶이 5년 단임제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현행 헌법가치를 100% 실현하고 추구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양극화와 인권침해, 인간존엄성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경제적 환경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기업이익을 위해 국민 생명과 건강을 2순위로 여기는 정치권과 행정관료들의 행태가 원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제도 이전에 사람의 문제가 더 크다.
그래서 아득했다. 서민가계와 한국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는 상황에서 서민가계 붕괴 위기를 해결해야 할 대통령과 정치권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최순실 게이트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서민가계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기에 아득함이 가득하고 더해만 간다. 개헌과 권력비리 단죄의 목적이 국민의 삶을 좋게 하는 것이라면 '서민가계 안정을 위한 경제원탁회의'를 먼저 만들자. 개헌없이도 서민가계 안정 대책은 마련하고 시행할 수 있다. 원탁회의는 거국경제내각과 같다.
다만 현 정부의 경제기조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중소기업과 서민가계 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단기 대책을 만들어 시행하는 방향으로 가자. 그리고 개헌논의를 같이하자. 서민가계 안정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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