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
최고 상쇠 이맹춘과 최상근(1908년생)이 당대의 조용필이었고, 천내나루 배걸립굿은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최상근의 장구는 신의 경지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출중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고, 최상근 팀은 해방과 건국 이후 전국적인 여러 경연대회를 휩쓸었다. 그리고 1961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 부문 최우수상인 내각수반상을 받음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농악에 관한 한 금산과 최상근 팀이 전국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여성농악단과 서커스단이 등장하고, TV 시대가 열리면서 금산의 농악은 쇠퇴하지만, 기초가 단단하였기에 금성초등학교에 농악부가 신설되면서 부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농악을 배운 전인근을 비롯한 국내 제일의 예술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금산농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금산농악, 좌도농악을 일으켜 세우자는 바람이 불면서 최상근, 주기환, 송용달, 정인삼 등 선생들의 지도 하에 금산농고는 금산 좌도농악의 부활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금산농고는 사물놀이를 비롯한 '두드리는 예술'에서는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을 수없이 배출한 학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렇게 탄생한 '금산농악보존회'는 금산문화원 산하단체가 되면서 탄력을 얻었고,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농악 부문 장원에 오르기까지 했지만,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무형문화재 지정에는 번번이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나는 금산문화원장을 지내면서 두 단체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안타깝게 지켜보았고 이들을 화합시키려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했지만 임기 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국내 제일 예술인 중 한 사람이면서도 고향 금산에서 농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한 전인근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합류하면서 금산농악은 마침내 화합을 이루게 됐고, 지난주에 '충남도 무형문화재 53호'로 등재되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예술가가 배가 고프다. 금산이 자랑하는 한 훌륭한 화가 한 사람이 '이놈의 못된 재능을 배워서….'하며 삶이 팍팍한 것을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재능으로 볼 때 적어도 생활에 어려움은 없어야 했다.
그렇지만, 지역마다 아마추어가 예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경지에 오르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우리의 예술계는 '희망이 있다'는 기대도 하게 된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금산에는 농악뿐만 아니라 서예, 한국화, 판소리, 국악 등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일반인'들이 많이 있다. 모두 자신의 생업을 갖고 있고, 취미로 시작한 예술을 통해 자기계발을 하면서 지역민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려 하는 봉사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승인받는 과정에서 전인근 선생이라는 '프로'의 도움이 컸지만 '아마추어'들이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뭉쳐 이뤄내는 모습을 10여년 간 보아왔기에 개인적으로도 기쁨이 크다. 농악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예술 각 분야에서 이런 성취들이 계속된다면 '프로' 예술가의 삶도 조금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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