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 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모욕죄 소송도 크게 증가했다. 봇물 터지듯 하였다. 인터넷이 보급된 후로는 사이버 명예훼손과 모욕죄 처벌 건수도 급증했다.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해 본다. 말과 글이 거칠어졌다. 마음이 거칠어진 사람들은 말과 글 대신 법의 칼을 빌려 왔다. 권리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힘없는 일반인들이 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훼손 된 명예를 되찾겠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겠다. 언론에 의한 명예훼손이나 권력자들이 내뱉은 말로 명예를 훼손당한 시민들로서는 오히려 법적인 대응을 활용할 필요도 있다. 언론중재 제도와 민사 법원을 통한 언론소송이 그러하다. 온전하게 복원되지는 못하지만 일부분이나마 명예훼손의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명예훼손 소송은 오점 투성이다. 특히 고위 공직자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남용하고 희롱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후진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증표다. 말로 대화하고 글로써 해명할 풍부한 기회를 가진 권력자들이 오히려 상대방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데 앞서고 있다. 징역을 살리거나 벌금을 크게 물려서 형사적 고통을 가해 달라는 것이다. 의혹을 받을만한 행위를 해서 명예훼손의 위험을 자초한 공직자와 권력자들이 오히려 형사처벌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은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 대부분 무죄로 결론이 내려지곤 하는데, 시민을 고소하여 처벌에 실패한 공직자들에게서 반성하는 빛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공적 기관의 대표는 명예훼손죄로 누구를 처벌해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의혹이 제기된 행위를 부정할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명예훼손 소송의 백태 중에서 '뻥치고 줄행랑' 놓는 유형의 전형적인 사례다.
최근 어떤 공영방송사를 관리·감독하는 이사회의 아무개 이사장이 명예훼손 민사 소송 1심에서 패했다. 이사장은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던 야당의 전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법원은 전 야당 대표의 명예를 훼손한 책임을 물어 방송사 이사장에게 3천만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선고했다. 이사장의 발언은 진실하거나 진실한 것으로 오신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근거 없이 다른 사람에게 빨갱이, 종북주의자, 공산주의자라는 말의 딱지를 붙였다가 명예훼손 책임을 진 사례는 상당히 많다. 단순한 정치적 수사나 의견의 표명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을 해칠 수 있는 사실적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법원은 유명한 공적 인물을 '또라이'라고 표현한 대학 교수를 무죄 판결했다. 고위 공직자나 공적인물들은 언론과 사회의 비판을 견뎌야 하고 다소 경멸적인 언어가 비판에 수반되더라도 이를 용인해야 한다는 취지다.
지난 20여년에 걸쳐 우리 법원은 공적인 인물, 특히 공직자의 도덕성과 청렴성, 자질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 과정에서 그의 명예가 훼손되더라도 공직자는 견뎌야 한다는 기준을 확고히 해 왔다. 공직자에 대한 비판이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명예훼손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다. 거친 말과 글은 더 순화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정당한 비판을 수용하려는 공직자들의 자세다. 특히 언론과 시민을 형사처벌하겠다는 발상과 시도는 애초에 배제되어야 한다. 고위공직자와 선출직 공무원들이 언론과 시민을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하려는 고소권을 제한하는 입법이 필요하다. 최소한 반의사불벌죄를 친고죄로 바꾸는 규정 개선도 시급하다. 명예훼손과 모욕과 처벌과 또라이라는 거친 언어 대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읊는 가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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