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권 목원대 총장 |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기에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서 다섯 섬 들이의 열매가 열리더군요.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혼자 들 수가 없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펑퍼짐하고 얕아서 쓸모가 없었습니다. 휑뎅그렁하니 크기만 컸지 아무데도 소용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려.” 이에 대해 장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다섯 섬 들이의 박을 갖고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큰 술통 모양의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않고 그것이 펑퍼짐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는 게요? 역시 선생은 앞뒤가 꽉 막히신 양반이구려!”
바가지를 무언가를 담는 용기로만 한정해서 보는, 틀에 박힌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화다.
요즘은 시골에 가 봐도 지게로 짐을 나르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대개 우리 곁에 있다가 사라진 것들에 대해선 향수를 갖게 마련이지만,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던 이 운송수단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만은 전혀 그런 감정이 없다. 산지가 많고 외나무 다리처럼 좁고 미끄러운 논두렁길 같은 곳을 통해서 무언가를 운반해야 했던 우리의 생활환경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탓이 크지만, 그렇다 해도 지게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어깨를 짓누른 운송수단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다른 운송수단으로 바뀌는 데 수백 년이 걸렸으니, 그 힘들고 불편한 걸 묵묵히 견뎠다는 면에서 우리민족은 어지간히도 '무던한' 민족이 아닐 수 없다.
그 무던함의 또 다른 예는 우리나라의 음식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음식점은 대개 방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을 깔고 앉는 방식이다. 오랜 세월동안 좌식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별 거부감이 없었지만 이젠 매우 불편하다. 집에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생활하고 사무실에서도 의자에 앉아 일을 보고 화장실의 변기조차도 양변기로 바뀐 지 오래인데, 식당만 가면 방바닥에 앉아 밥을 먹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분들은 일어날 때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아침에 잘 다려 입고 나간 바지가 꼬깃꼬깃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식당에서 외국인을 대접할 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배까지 불뚝 나온 외국인에게는 그런 데서 밥 먹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좌식생활에 익숙지 않은 요즘의 젊은이들은 아예 그런 식당가는 걸 피한다고 한다. 고정관념을 깨지 않음으로써 불편함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단 한 번 정해지면 아무리 불편해도 그대로 따르는 것, 좋게 말하면 전통의 고수지만 나쁘게 말하면 틀에 박힌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다. 대체로, 생활의 불편을 개선하려는 데서 문명은 발전하는데, 문명을 움직이는 동력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그랬으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니까'라며 아무생각 없이 그냥 따르기 쉽다. 그런 걸 바꾸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 사람들의 사고나 견해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를 가리켜 패러다임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패러다임 안에서 살게 마련이니 그것의 영향을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이미 어떤 패러다임을 따르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보편타당한 법칙도 아니고 그저 굳어진 사고의 껍데기라면, 패러다임은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바꿔야 하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바꾸는 데에서 온갖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따르지 못해서 뒤처지기도 하지만, 기존의 생각을 과감히 바꾸어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뒤처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나쁜 것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안해내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라면, 바가지를 바가지로만 보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닌, 유연한 사고를 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겠는데, 이 또한 교육의 몫이니 학교는 참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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