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영광 법성포
손바닥만한 냄비에 생조기 두 마리 깔고 고춧가루 살짝 뿌린 다음 다진 마늘과 쪽파 송송 썰어 물을 자작하게 붓고 찐다. 진한 풍미와 텁텁한 고등어와는 다르게 조기의 짭조롬하고 담백한 흰살을 떼어 밥에 얹어 먹는 게 꿀맛이다. '아! 맛있어'가 절로 나온다. 오래 전, 다시 자유를 찾았다는 벅찬 희열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서성이던 때가 있었다.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해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 연명했지만 창공을 나는 새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로웠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에서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수천 킬로미터를 유영하는 황금조기의 여정처럼 나 또한 새로운 인생의 닻을 올리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굴비의 고향 영광 법성포. 법성포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릿한 짠내가 거짓말처럼 진동했다. 뜨거운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택시기사가 일러준 대로 터미널 뒷골목으로 나갔다. 포구로 가는 길이다. 여기저기 굴비 가게가 늘어서 있는걸 보니 '천년의 빛 영광' 법성포에 온 걸 실감한다. 적막한 거리에서 나를 반기는 건 컹컹 짖어대는 백구 한 마리 뿐. 바닷물이 빠져나가 드넓은 개펄을 드러낸 포구는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소환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는다. 타원형을 이룬 포구 해안가를 따라 걷다보니 정박해 있는 고깃배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밤 바다에 나가 꽃게를 잡고 새벽에 들어와 그것들을 부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배들이다. 마침 나이 지긋한 남녀 일꾼들이 그물에 걸린 잡고기를 털어내며 그물을 정리 중이었다. 그 일도 나름 손맛을 요하는 일이었다. 충청도 사람인 나로선 꽃게는 태안·보령·서천 지역에서만 잡히는 줄 알았는데 법성포에서도 잡힌다니…. 그런데 그 많던 조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조기가 씨가 말랐당께요. ?어. 중국 어선들이 몰래 들어와 조기를 싹쓸이 해가서 지금은 씨가 말랐어. 여그서도 너무 많이 잡아들였고.” 그물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잡어를 떼내던 한 할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수억마리의 조기가 떼지어 몰려들 땐 장관이었다고 한다. 곡우가 오면, 살구꽃이 피면 칠산바다에 조기가 왔음을 알고 그 많은 배들이 조기잡이에 나가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 법성포는 조기 비린내가 밴 사내들이 술병을 끼고 니나노 집에서 작부를 희롱하느라 밤새는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옆에서 손을 놀리던 할머니도 거든다. “겁나게 많이 잡혔당께. 천둥 한번 치면 조기들이 몰려오고 천둥 한번 치면 조기떼가 나간다는 말이 있어. 조기들이 들어올때나 나갈 때 조기 울음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당께.”
봄이 되면 살구꽃은 여전히 피건만 칠산앞바다에 조기들은 오지 않는다. 법성포에서 말리는 고기는 먼바다 동지나해에서 잡히는 것들이다. 조기의 사촌인 부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참조기는 워낙 귀하고 비싸 돈 있는 양반들 밥상에나 오르는 생선이 됐다. 헌데 요즘은 어딜 가나 이주민들이 눈에 띈다. 배에서도 그물을 만지고 있는 젊은 남자들이 있어 자세히 보니 외국인이었다. 베트남에서 왔단다. 그 중 똥위(33)라는 젊은이는 부인과 함께 한국에 온 지 3년 됐다. 아! 어른들 틈에서 다소곳이 일하던 젊은 처자가 부인이었구나. 똥위 부부는 웬만큼 돈이 모이면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예정이다. 배타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까 똥위는 괜찮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어눌한 한국말로 “누나는 어디 살아요?”라고 물었다. 어라? 나보고 누나래? 우히히. 야구모자 쓰고 배낭 멘 내 모습이 나이 가늠이 안됐는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줌마' 소리만 듣다가 '누나'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우리 베트남 젊은 신랑 센스 있는 걸?
그늘에 들어오면 소슬바람이 불어 달콤한 낮잠에 빠지고 싶지만 햇볕은 아직도 쨍그렁한다. 법성포의 늙은이들이 밥벌이에 여념이 없는 사이 낚시꾼들은 망둥어를 잡고 있다. 땡볕도 아랑곳 않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망중한을 즐기면서 경주지진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낚시꾼의 일행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거기 사람들은 불안해서 어떡하나. 에이구,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 오늘 하루가 젤 중요하지”라며 혀를 찬다. 세상사 이치가 그런 것 같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탄생과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인생도 있는 법. 여름이 가듯이 그렇게 황금조기떼도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믿고 싶다. 다시, 살구꽃 피는 춘삼월에 황금조기떼의 천둥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법성포를 찾게 될 날을….
▲가는길=서대전역에서 광주까지 첫차로 새벽 6시 5분 무궁화호 기차가 있다. 대전복합터미널에서 고속버스도 자주 있다. 2시간 30분 걸린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법성포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먹거리=영광 법성포하면 단연 굴비다. 굴비정식 식당이 많다. 그런데 1인분은 안 팔아서 먹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지나가면서 고소한 굴비 냄새만 맡았을 뿐이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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