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은 복되고 즐거운 일이 많은 조짐(상서로운)의 땅이란 이름을 지녔다. 1200년전 마한의 56개 속국 중 하나 치리국국으로 탄생한 서산은 미리부터 오늘의 서해안 시대를 예비한 느낌이 짙다. 풍수 지리상 옥녀 탄금형, 금학 포란형의 길지에 속하는 서산은 주산 옥녀봉의 그늘 아래 나래를 펼쳤다.
속세를 떠난 청정한 곳을 말하며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고성군, 경남 함양군, 전북 진안군등 7~8곳뿐인 명당이다. 서산의 터전이 된 옥녀봉은 예로부터 유택길지의 명당을 지녔으며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입신양명하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전해왔다.
20세기 초 서산에는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주민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옥녀봉을 확인하니 누군가 명당자리에 묘를 썼음을 발견했다. 주민들이 암장된 산소를 파내 옮기자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일화가 오늘날 서산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주민들은 옥녀봉에 묘를 쓰지 않는다. 이 같은 옥녀봉의 은덕이 내리 뻗은 곳이 서산의 옛 땅 부성군이다.
부성군은 옛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성 아래 자리 잡았다고 하니 지명을 부성산성에서 얻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부성군엔 진성여왕 7년(894년) 태수로 최치원이 부임하기도 했다. 부성군은 고려 인종(1123~1146년)때는 현령을 뒀다. 그러나 명종12년(1182년) 고을 사람 호장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 역모의 땅으로 낙인찍히며 관호마저 제거 당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부성군은 폐군이 되어 인근 운주에 붙여지는 것이다.
서산(부성군)이 다시 복군 된 것은 이후 100여년이 지난 충렬왕 13년(1284년)이다. 충렬왕은 당시 주민 정인경이 괴산과 신창에 침입해 진을 친 몽고군을 습격,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을 가상히 여겨 다시 회복 시켜 줬다. 부성군은 복군과 함께 서산군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울러 지군사로 승격됐다가 충렬왕 34년(1308년)에는 다시 서주목으로 승격하는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서산군은 충선왕2년(1310년) 다시 서령부로 강등됐다가 다시 지서 주사로 강등되는 화를 입는다.
서산은 이후에도 조선 조에 이르기 까지 무려 7~8차례 지위 격하와 복군의 성쇠를 반복 한다.
태종13년(1413년) 서산으로 회복한 이 땅은 숙종21년(1695년) 강등됐다가 18년 만에 다시 회복됐다. 20년만인 영조 9년(1733) 또 다시 현으로 강등했다. 이어 9년 후 다시 군으로 회복한 서산은 다시 정조 원년(1777)현으로 강등, 9년 후 복군 됐다가 융희원년(1914) 행정구역 개편으로 태안과 해미를 병합한다.
이렇듯 역대 왕조의 관제개편에서 군세의 부침을 거듭한 서산은 이후 88년 말까지 74년간 충남 제1의 웅군으로 성장을 재촉, 길지로서 용틀임을 시작했다. 이윽고 89년 1월 1일 군에서 시로 승격한 서산은 서해안 시대라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
서산=방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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