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상드르 뒤마 |
▲ 알베르 카뮈 |
팡테옹 안장자 선정에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논란 속에 안장이 무산되거나 적격성 논란에서도 팡테옹 안장자로 모셔져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사례도 있다.
팡테옹 안장자를 결정하는 권한이 의회에서 대통령에게 이양된 1958년 이후에도 국민적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있어 국립현충원 팡테옹의 가치가 보존될 수 있었다.
2010년 제기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장논란에서 팡테옹에 잠재된 갈등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2010년 1월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이방인'을 집필한 알베르 카뮈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안장하겠다고 밝혔다.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빈곤 속에서 성장한 카뮈는 24세에 첫 작품을 발표하고서 2차대전 당시엔 나치 점령하에 레지스탕스에 참가해 지하 신문 '콩바(전투)'의 주필로 저항운동을 펼쳤다.
그는 1942년 '이방인'과 '시지프스의 신화'를 발표했고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카뮈의 작품들은 인생의 의미와 저항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보부아르 등과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화의 전성기를 일궈냈으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우파인 사르코지 대통령이 좌파 저항의 상징인 카뮈의 유해를 옮겨 팡테옹에 안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프랑스에서는 카뮈의 유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여기에는 카뮈의 아들 장 카뮈도 뜻을 같이해 아버지 유해 이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따라 카뮈의 유해는 지금까지 루르마랭의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가족의 거부와 사회적 논란으로 팡테옹 이장 계획은 무산됐다.
반대로 프랑스 대중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해가 사망 132년 만인 2002년 12월 팡테옹에 이장될 때도 논란은 있었으나 재평가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여왕 마고' 등을 쓴 뒤마의 소설과 희곡들은 베스트셀러였지만 학계는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깊이가 없다는 이유에서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아이티출신 흑인 노예의 혼혈 후손인 그를 프랑스 공화국의 대표적 위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뒤마만큼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황과 문화를 잘 묘사한 작가가 없다는 재평가가 이뤄졌다.
특히, 아이티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뒤마가 흑백 혼혈의 혈통과 작품의 통속성을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국민적 공감대 속에 팡테옹에 안장될 수 있었다.
이 같은 팡테옹에 안장자 선정 과정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가적 위인 칭호를 받을 만한 많은 인물이 아직 팡테옹에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로 익히 알려진 클로드 모네(1840~1926)부터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 루이스 파스퇴르(1822~1895) 등이 “팡테옹에 안장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갈등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 팡테옹의 안장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이양되면서 정치적 성향에 좌우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당초 팡테옹은 1791년 4월 제정된 팡테옹 건립에 관한 법률에서 안장될 인물에 대한 결정은 의회의 독자적 권한이었다.
1958년 그 권한이 대통령에게 이양되면서 대통령은 문화부장관의 보고를 근거로 총리의 제안에 따라 안장자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사회 여러 단체가 팡테옹 안장자를 제안할 수 있고, 이 같은 제안을 총리실에서 받아들일지 검토 후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하는 구조다.
팡테옹 안장식에서 대통령의 이름으로 추도할 수 있고 위대한 인물을 대통령이 결정하게 되면서 정치적 주관성에 영향을 받을 요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팡테옹 안장자를 제안이 접수되고 문화부장관과 총리실을 경유하는 동안 여론이 만들어지고 반영되면서 순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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