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호 전 한밭대 인문대학장, 수필가 |
조선시대 재상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일을 엮은 ‘상신록’(相臣錄)에 ‘불언단처’(不言短處)라는 경구가 있다. 이러구러한 사정으로 원문(한문)을 게재하지 못하고 그 내용을 짤막하게 밝히면 “‘상진’尙震이라는 분이 고향에 찾아가는데, 농부가 2마리 소를 가지고 밭가는 것을 보고 그 낫고 못함을 물으니 가만가만히 말하기를 ‘짐승의 마음이나 사람의 마음이나 다 마찬가지다. 만일 낫고 못한 평하는 것을 들으면 낫다고 한 놈은 기뻐하고 못하다고 한 놈은 노여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작은 놈이 낫습니다.’하였다. 이에 ‘尙震’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공公은 숨은 군자이십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이로부터 남을 거스르지 아니하였다”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좋은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생각있는 이라면 아는 것과 같이 오늘의 우리 사회는 가히 여러 면에서 폭력성이 드러나 있다. 특히 남의 마음에 칼을 꼿는 것 같은 가학적인 말의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는 지경이 됐다. 문정희 시인은 말이 무기화 된 시대라고 얼마전 경북 칠곡의 어느 시 낭독회 자리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시’詩가 악기樂器라 했다.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여러 모습의 ‘시위’에서도 언어 폭력은 그 도가 너무도 지나친게 현실이다.
이제는 이런 언어 폭력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하면 듣기가 거북하다는 속언도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짜증이 날 정도로 이해해 주고 포용해줄 인내의 한계점을 넘을 정도다.
모두 다 시 쓰는 심정과 같이, 또는 성당에서 미사 성제를 올릴 때에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옵니다. 제 탓이옵니다.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며 뉘우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밥상머리에서 교육현장에서 일터에서 희락시설 기타 각자 처한 삶의 현장에서 좀더 들숨 날숨을 깊게 여러 번 하고 나서 제 할 일을 한다면 아마도 ‘말의 무기화, 언어 폭력’의 유혹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그러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도 자연스레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맑은 물 흐르듯이 흘러나와 따사로운 인정의 샘물이 지속적으로 솟아날 것임도 현실이 될 것이다.
본래 우리 겨레의 심성, 곧 마음밭이 맑고 밝았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어떤 일이든 좋은 면은 남에게 잘못된 면은 내 탓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겨레가 우리 겨레였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도 우리 사회는 그래도 건강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세계가 주목하고 칭송하는 나라가 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남을 위해 봉사 헌신하고 나를 낮추고 몸 돌보지 않는 선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알 수가 없다.
이참에 필자도 내가 직접 알고 지내거나 나름대로 좋아하는 분의 얘기로 너스레를 떨고자 한다.
우선, ‘김용복’이라는 친형같은 교수가 있는데 어느 모임 때나 음식값, 교통비, 그 이외의 돈들을 귀신도 모르게 지불한다. 뿐인가 애국심과 의협심이 두터워서 의롭다고 여기는 이가 압박을 받으면 칼보다 무서운 펜의 위력을 발휘하여 그 의로운 이를 성심으로 돕는다.
필자가 일관되게 이끌어 온 논지로 볼 때 우리가 사는 이 가정, 사회, 국가는 그래도 살만한 아니 살고 싶은 진정한 삶의 터, 좀 지나치게 표현해보자면 파라다이스도 되지 않겠는 가 싶다.
/김선호 전 한밭대 인문대학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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