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국불교를 대표해 일본 미나미 총독에게 불호령을 내려 벌벌 떨게 했던 만공선사<사진>의 얘기가 있다.
1937년 3월 11일이었다. 악질로 유명세를 탄 일본 미나미 총독은 전국 13개 도지사와 불교 31본산 주지를 불러 모아 조선불교진흥책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다.
미나미는 이 자리에서 “조선불교는 일본불교와 합병해 더 큰 진흥을 이뤄야 한다”며 야비한 눈을 흘겼다.
회의장에는 총과 칼을 옆구리에 찬 일본군 헌병대 등이 도지사와 주지들을 압박해 침묵만이 흘렀다.
이때였다. 당시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은 책상을 부서질 듯 두 손으로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미나미에게 손가락질하며 사자후를 토했다.
만공은 “조선불교는 1500년 역사를 유지하고 그 수행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불교와 합하여 잘 될 필요가 없으며, 일제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며 “데라우치 전 총독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으로, 죽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회의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린 만공의 목소리에 미나미 총독과 헌병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날의 일은 일본군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결국 조선불교말살정책에 실패했다.
1940년 10월 1일 발간한 조선총독부시정 30년사에서 일본은 “조선불교의 진흥에 관해서는 시정 이래 시종일관 보호 선도에 힘쓰고 있는 중이지만, 기대한 만큼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적었다.
만공은 만해 한용운에게 독립자금도 지원했다.
당시 만공을 모셨던 수연스님(91)은 “총독부 회의와 선학원 고승대회 등에서 만공이 만해에게 독립자금이 든 봉투를 건넸다”고 밝혔다.
때문에 지역사회에서는 만공을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 만공 대선사에 대해 연구하는 학술대회가 오는 8일 오후 1시 예산군 수덕사 황하정루에서 열린다.
심응섭 순천향대 명예교수가 사회를 보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김시명 순국선열 유족회장, 이덕진 문성대 교수, 김광식 동국대 교수, 이은윤 전 기자, 하춘생 동국대 교수, 이동언 동국대 교수의 연구발표가 진행된다.
혜월 스님(운상선원 주지), 주경 스님(불교신문사 사장), 한상길(동국대 불교학술원), 경완 스님(수덕사 환희대), 이정은 3·1운동 기념사업회장의 토론도 열린다.
만공은 1871년 태안에서 태어나 1883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했다.
만공은 1941년에는 일본의 식민불교정책에 항거하기 위해 선학원 고승대회를 주도하는 등 일제에 대항했으며, 광복 직후인 1946년 생을 마감했다.
예산=신언기ㆍ내포=유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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