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찾은 프랑스 파리 시내에 위치한 팡테옹은 “조국이 위대한 이들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오목새김 글귀로 방문객을 맞았다.
팡테옹은 그리스어로 신들을 모시는 궁전을 의미하는데 기존 생트주느비에브 성당을 프랑스 혁명용사를 위한 무덤으로 용도 변경해 만들었다.
프랑스 국가적 위인을 모신 팡테옹이 사실 성당을 용도변경해 만든 것으로 팡테옹의 탄생은 프랑스 혁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89년 7월 바스티유감옥 점령사건으로 촉발된 대혁명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한 곳에 안치할 장소가 필요했고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이제 막 완성된 생트주느비에브 성당에 주목했다.
생트주느비에브 성당은 루이 15세의 절대군주의 위엄과 권위를 여러 예술적 건축기술로 표현된 성당이었고, 프랑스 혁명의 명분이었던 왕정 종식과 탈 기독교를 상징할 수 있는 곳이었다.
1791년 4월 혁명 위인 미라보의 시신을 안치하기 적합한 장소를 찾던 중 생트주느비에브 성당을 국가 위인들을 기리기 위한 신전으로 변형시켰다. 1791년 볼테르, 1784년 장자크 루소와 마라가 옮겨진 팡테옹이 탄생했다.
종교시설로 만들어진 성당이 신이 아닌 혁명용사를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수도사 안치를 위해 만든 성당 지하 납골당 역시 공동묘지로 1807년 용도변경 됐다. 이로써 팡테옹은 프랑스 연속성과 국가의 화해를 구현하는 장소이면서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적 건물이 됐다.
기존 생트주느비에브 성당은 1791년까지만 해도 실내가 무척 밝았다. 40여개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성당 내부를 가득 채웠다.
프랑스 혁명 위인들을 위한 묘지에는 밝은 실내가 어울리지 않았고, 혁명정부는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기존창 대부분 막았다.
생트 주느비에브 유골을 성당 중앙에서 빼내고 둥근 천정에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백합이나 기독교를 의미하는 천사의 얼굴 등의 벽화와 조각을 모두 없앴다.
대신 '조국은 위대한 시민과 군인들에게 자유의 왕관을 나눠주며 역사는 그들의 이름을 쓴다'는 제목의 그림이 실내를 장식했다.
왕권과 종교적 상징을 제거하고 국가적 위인을 위한 공간으로 팡테옹도 부침을 겪었다.
두 차례 교회에 반환돼 본래 성당의 기능을 되찾았다가 팡테옹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1885년에서야 교회와 완전히 작별하고 프랑스 공화주의 사상을 수호한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국민 통합장소가 됐다.
팡테옹은 메인층과 지하 납골당으로 구분되는데 1층 중앙홀은 성녀 주느비에브의 일생과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혁명 대표가들을 표현한 벽화와 조각이 새겨져 있다. 톨비악 전투와 샤를마뉴의 대관식, 생루이에 의한 법 개혁, 잔다르크와 함께하는 백년전쟁의 끝 등 프랑스 국가 건설 과정에 대한 묘사가 이뤄졌다. 내부에는 저명인사에 대한 경의가 표현돼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동안 사망한 문학가들에 대한 경의도 담겨 있다.
하상복 교수는 그의 저서 '빵테옹, 성당에서 프랑스 공화국 묘지로'에서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혁명의 의미와 정당성을 재생산하는 장소”라며 “팡테옹을 무대로 사자의 정치를 원하는 혁명세력과 그것에 저항하는 반혁명세력 간의 지난한 대결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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