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옥상텃밭에 올라가 보니 방긋방긋 환하게 웃어대는 고운 얼굴들이 나를 황홀경(恍惚境)에 빠지게 했다. 그리 거칠어 보이는 몸에서 어찌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는지.
온몸을 가시로 둘러쳤기에 틈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선인장이 아름다움을 숨겨 놓았다가 이렇게 드러내어 생명력의 신비를 보일지 어찌 알았겠는가. 올 여름 달포나 계속되는 가뭄과 무더위 속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는 선인장 꽃. 한 송이 자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인고(忍苦)하며 아픔을 견디어 내었을까?
선인장은 주로 건조한 사막에서 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잎을 가시로 퇴화시켰다 한다. 그리고 퇴화된 가시로 수분 증발을 최대한 줄이고, 몸통인 줄기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열과 건조(乾燥)에 견디기 위해 물을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이렇듯 몸속에 물을 많이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사막과 같이 물이 적은 환경에선 수분 섭취를 하려는 동물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퇴화된 잎을 이용해 온몸을 가시로 덮어 다른 동물들에게 먹히는 것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 얼마나 놀라운 자연의 신비요 우리 인간들이 배워야 할 지혜로움인가?
하지만 선인장 꽃은 아름다움에 비해 하루만 피고 쉽게 시들어 버려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왜 그럴까? 도대체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자랑스럽게 피어난 선인장 꽃에게 하루살이를 준 까닭은?
이런 악조건을 이겨내고 화사하게 피어오른 선인장의 꽃을 보며 과거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도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피워낸 선인장 꽃처럼 하루아침에 시들어 버리고 말면 어찌한다 말인가.
우리 민족 5천년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침략, 그리고 36년이라는 일제 식민지로 인한 핍박과 고난, 거기에 8.15해방이 되자 우리민족끼리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이며, IMF사태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어 왔다.
그렇게 우린 50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가난하게 버텨왔다.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전통을 중시하며 인정이 두텁고 이웃과 상부상조하는 내공(內攻)을 마음속에 길러왔던 것이다. 소비를 줄이고, 모든 것을 아끼며 견뎌내었고, 70년대에 와서는 대통령과 한 마음이 되어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있게하였다. 그 결과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발전된 모습도 뽐내었고, 2002년에는 월드컵 개최로 우리 국민들의 단합된 열정적인 거리 응원에 세계인들을 놀라게도 했으며 국민소득 2만 5천 불 시대로 성큼 다가서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2만 5천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부유함이 우리 조상들께서 인고(忍苦)하며 쌓아온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잊고 산다.
어느 날이던가. 대전에 살고계신 은사님께서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이라 하시면서. ‘춘화현상’(春化現象 – Vernalization)에 대한 글을 보내주셨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는데 이듬해 봄이 되어도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한다. 첫해라 그런가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한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알게 된 결과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이나,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2만5천 불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것도 과거 5천 년이란 긴 세월을 움츠리고 살며 고난의 인내를 겪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혹자는 나 혼자 잘나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과거 5천 년 역사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힘을 합쳐 막아내었고, 홍역이나 천연두가 돌 때나 가뭄과 홍수가 올 때도 힘을 합쳐 막아내었던 것이다.
‘더 나은 나’는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불어 노력할 때 ‘더 나은 내’가 있고, ‘더 나은 우리’가 있으며, ‘더 나은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예전의 어려움을 잊고 나만 잘났다고 경거망동(輕擧妄動) 한다면 가뭄을 이겨내고 활짝 핀 선인장 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핀다한들 하루살이로 끝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정치지도자들도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아웅다웅하지 말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노력하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는 것이다.
기나긴 가뭄과 무더위를 이겨내고 활짝 핀 선인장 꽃!
그것은 우리 민족끼리 내홍(內訌)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김소영(태민) 시인
▲ 김소영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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