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 제적부 소멸 등 이유로 후손 찾지 못해 훈포장 미전수
#1. 대전 출신 고 최철호(1915~1941) 선생은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20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서 혁명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중국 중앙유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제6기로 졸업했다. 최 선생은 한구로 이동해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서 항일선전 임무에 전력했다. 5년 뒤엔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41년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쳤다. 수십 차례의 격전 중 최 선생은 같은 해 12월 26일 ‘하북 형대 전투’에서 동지 4명과 함께 적에 맞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순국했다.
#2. 논산에 본적을 둔 백순(1863~?) 선생은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백 선생은 1909년 북간도로 망명해 간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간민회는 북간도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기구였다. 그는 한인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또 농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의 경제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포교하는 등 북간도 한인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애썼다. 1921년엔 대한독립군단의 고문으로 선임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독립군단은 북만주에 집결한 독립군들이 결성한 군사조직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항일활동을 하다 순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최철호 선생은 1993년,·백순 선생은 2009년에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은 건국에 공로가 있거나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된다.
그러나 광복 71주년이 되도록 훈장은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 훈장을 전달받을 후손을 찾지 못해서다. 두 선생처럼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도 훈포장을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는 많다.
국가보훈처의 훈장미전수자명부에 따르면 훈포장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는 전국에 모두 5237명. 지역에선 대전(4명)을 포함해 충남 154명, 충북 117명, 충청도 2명 등 273명이 훈포장을 전달받지 못했다.
모두 의병활동, 만주 항일운동, 3·1운동 참여, 군자금 모집 등 여러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이다. 이들에겐 공적에 따라 애국장, 애족장, 대통령표창, 건국포장 등이 각기 수여됐다.
하지만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이들의 훈포장엔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후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본적과 주소가 확인되지 않아 제적부 조회가 불가능한 경우다. 제적부상 본적·주소가 정확히 기재돼 있지 않거나 아예 소실된 경우도 후손 추적이 쉽지 않다. 일제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명으로 활동했거나 후손이 없는 자들은 신원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전지방보훈청은 지자체에 제적부 확인을 의뢰하거나 본적지 조사를 나서는 등 훈포장을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전지방보훈청 관계자는 “제적부 소실 등의 이유로 후손을 찾지 못해 훈포장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분들이 있다”며 “어렵더라도 후손을 끝까지 추적해 훈포장을 전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독립유공자 후손인 경우 제적등본, 족보 등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제출하면 된다. 훈장 미전수 독립유공자 명단은 국가보훈처와 공훈전사자사료관 홈페이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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