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권 목원대 총장 |
옛날에는 여름밤이면 마당에 깐 밀집멍석 위로 온 식구가 다 모였다. 먹을거리라고 해야 삶은 감자나 찐 옥수수가 전부였지만, 그곳에 이웃집 식구들까지 모이면 이야기꽃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참 동안 이야기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새 모기들이 달라 든다. 누군가가 마당가의 풀을 한줌 베어다가 모기 불 위에 던져 넣으면 모기들이 사라졌다. 그 시절 더위를 잊게 해주던 것은 바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주로 어른들이 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른들의 경험담이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등 직접 경험한 것들이니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듣는 사람들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재미란 오늘날의 연속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모두 듣는 사람과 직접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삼사십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걸 듣는 우리에겐 마치 삼국시대의 이야기인 냥 아득하기만 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얘기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아니다. 그 속성상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만주 벌판에서 마적을 만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의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듯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손자는 이야기 속의 할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할아버지 세대와 손자 세대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인종의 벽도 넘어서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란 작품을 보면 흑인인 오셀로에게 아리따운 백인 처녀 데스데모나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흑백의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묻는 말에 오셀로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수없이 많은 진귀한 경험담, 그것은 바로 오셀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십 편의 영화를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데스데모나가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야기는 불러 세워 놓고 들려주면 재미가 없다. 그렇게 하면 훈계가 되기 쉬운데, 훈계처럼 듣기 싫고 효과 없는 것도 없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가끔은 이야기에 교훈이 될 만한 주제를 하나 슬쩍 집어넣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몰입이다. 청자가 이야기에 몰입할 때 비로소 이야기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멍석 깔 마당도 없고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빠져 각자의 세계로 달아나는 요즘, 아이들이 도무지 어른들의 이야길 들으려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늘날도 방법이 전혀 없진 않다. 아이들하고 둘레길 같은 곳을 산책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숨차지 않게 천천히 걸으면 이야기 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가르치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다. 가르치려 안 해도 이야기가 결국 다 가르침을 줄 것이니 말이다.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인성교육엔 엄청난 효과가 있다. 자녀와의 대화는 많을수록 좋다. 자녀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바람직한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학교만 보낸다고 교육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무더운 한여름 밤에, 자녀와의 산책길에 빙수 한 그릇을 사서 함께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 나눌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박노권 목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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