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1960년작 ‘싸이코’ |
한여름 곰탕 끓듯 푹푹 찐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철 지난 아지랑이를 마구 피워 올린다. 혀를 한 자나 빼문 개마냥 식전부터 늘어져 있다. 열기로 가득찬 비닐봉지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들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이웃 할머니가 “여지껏 살았어도 올 여름처럼 더운 건 없는 거 같구먼”이란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산으로 바다로 어디를 가든 이 찜통같은 더위를 피하는 건 수월찮아 보인다. 이럴 때 후덜덜 으스스한 서스펜스 공포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1960년작 ‘싸이코’ |
#공포와 통렬함이 여전한 영화, ‘싸이코’
히치콕의 ‘싸이코’를 보았다. 냉방 빵빵한 극장에서 공포영화를 보는 맛은 역시 오싹했다. ‘싸이코’는 과거가 현재에 행사하는 횡포에 대한 명상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노먼 베이츠는 어머니를 죽이고 모친살해를 부인하기 위해 시체를 보관하고, 광기가 발동하는 순간에는 어머니의 정체성을 취하는 다중인격 장애의 인물이다. 모친살해는 인류문명의 시작과 함께 천착한 중요한 문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적 방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의 부정을 저지하고 어머니의 삶을 파괴하는 햄릿의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집착의 대상 어머니의 또다른 여인들은 수줍은 청년 노먼에게 억압된 성적 본능을 일깨워 히스테리와 살인을 낳는다. 날카로운 바이올린 연주가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이 영화의 전설적인 샤워 살인 장면은 공포보다는 폭력과 절망의 인상을 주는 건 왜일까.
TV에서 종종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너무 무서워 서둘러 채널을 돌렸던 장면은 따로 있다. 소란스런 차 소리와 한여름의 열기가 수그러들면서 적막만이 어둠을 지배할 무렵, 꼭 그 장면을 대면할 게 뭔가. 주먹을 불끈 쥐며 반드시 보리라 다짐하건만 쇳소리같은 히스테리컬한 효과음이 귓전을 때리면 번번이 실패한다. 마리온의 동생 라일라가 미라가 된 노먼의 죽은 어머니를 발견하는 장면 말이다. ‘싸이코’는 우리 자신의 분열된 감정,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대놓고 까발린다. 여러번을 보아도 그 공포와 통렬함이 희석되지 않는 이유다.
인간에게 공포라는 감정은 엄마의 안락한 자궁에서 세상 밖으로 밀려나오는 순간 직면하게 된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앞에 두고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인간은 이성으로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다. 그 억압된 욕망은 인간에게 문화원형이 되어 우리의 뇌구조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하게 일렁인다.
▲톰 드시몬 감독의 1981년작 ‘헬 나이트’ |
억압돼 있는 야수같은 본능은 이성의 시대의 탐구 영역
어린 시절, 깊은 밤 앞산 숲속에서 들려오는 너구리 울음소리에 변소에서 오줌 누다 말고 신발을 내동댕이치며 방으로 뛰어들어갔던 기억. 어둠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귀신으로 보여 엄마 등에 찰싹 붙어 잠을 잤던 기억. 공포의 원형은 그렇게 구미호가 탄생되고 늑대인간이 뉴욕 도심에 출몰하는, 인간의 DNA에 각인돼 있다.
고 1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본 ‘헬 나이트’는 그저그런 3류 공포영화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4명의 신입생 남녀가 흉가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괴물에게 한명씩 살해당한다는 줄거리인데 볼 당시에는 엄청 무서웠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수다스런 사춘기 여학생들이 단체로 공포영화 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꺅꺅’ 비명소리에 극장은 폭발지경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영화의 여운이 남아 끔찍한 장면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칠흑같이 캄캄한 차창 밖에서 괴물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골똘히 생각해서 그런지 속까지 메스꺼워 안하던 멀미도 했다. 그런데 친구 둘은 천하태평으로 배고프다며 빵을 볼이 미어터지게 뜯어먹으며 시시덕거리는 게 아닌가. 난 무섭고 불안해서 금방이라도 울 지경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텍사스전기톱 살인사건’ 같은 사지가 잘려나가고 피칠갑 하는 노골적인 공포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공포영화는 우아하고 낭만성이 가미되어야 공포감이 극대화돼 감정이입이 제대로 된다. 궁금한 게 있다. 히치콕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돼 공포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는데 왜 포의 소설을 하나도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검은 고양이, 어셔가의 몰락, 붉은 가면의 무도회 등 걸작이 얼마나 많은가.
CGV 아트하우스에서 지금 ‘히치콕 특별전’이 열린다. 외국에는 호러영화 극장, 포르노영화 극장 등 장르영화 전용관이 있어 취향에 맞는 영화를 맘껏 볼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 양면이 공존한다. 그 심연 속에 억압되어 있는 야수같은 본능은 이성의 시대에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이다. 파괴적이고 성적인 욕망이 질펀한 ‘엘레강스하고 임팩트한’ 영화를 상영하는 전용영화관이 대전에도 있다면….
우난순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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