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봉창 의사/사진=중도일보db |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가 터졌다. 수류탄은 도교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국왕 일행을 겨냥하고 있었다. 여러 대의 마차 중 수류탄은 마차 한 대의 말과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
허나 수류탄이 목표로 했던 마차가 아니었다. 수류탄이 향해야 했던 곳은 히로히토의 마차였다. 히로히토의 암살은 실패로 끝났고, 일본 경찰들은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군중을 이 잡듯 뒤졌다. 경찰은 한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진범이 아니었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자수를 했다. 일본인과 다름없이 유창한 일어를 행사하면서 자신이 범인임을 실토했던 사람이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였다.
적의 심장부에서 적의 왕을 죽이려 할 만큼 대담했던 이봉창 의사는 백범 김구도 인정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 이봉창 의사의 한인애국단선서문/사진=중도일보db |
독립운동에도 늦게 투신했던 이봉창 의사는 그가 큰 뜻을 펼치기 전까지는 평범한 조선인 청년이었다. 가게 점원과 철도운전 견습생 등 가난한 노동자의 길을 걷다가 식민지 조국을 뒤로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인 양자가 됐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얻고 보통의 식민지 청년으로 ‘모던보이’적인 생활을 했던 이봉창.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겪으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됐다.
31세에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게 됐고 수소문 끝에 찾아갔다. 유창한 일본어에 일본식 옷과 나막신 게다를 끌고 다니며 일본 총영사관과 경찰까지 지인으로 둔 그의 모습에 ‘일본영감’으로 불리며 밀정이라 의심했다.
그러나 한 술자리에서 “왜 일왕을 처단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할 정도로 대범했던 그는, 자신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향했다. 그가 거사의 마음을 품고 중국을 떠나올 때 일본 경찰이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자신들의 안방에서 왕이 죽어나갈 뻔한 사건에 일본인들은 가슴을 쓰러 내렸을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어도 기개만은 잃지 않았던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1년 8월 10일 ‘오늘’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누구도 그 아이가 커서 세상을 뒤집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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