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종권 산내초 교감 |
오늘의 공문서 처리와 교내 순회 점검 등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방학이라 그런지 약간의 여유가 느껴진다. 잠깐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교무실에 들어와 “사랑합니다!”라고 우리 학교의 인사말과 함께 공손하게 인사하는 6학년 학생에게 다정하게 응대하면서 스쳐지나는 생각이 있어, 교육전문가로써 교육학이나 교육과정 등 해당 용어를 사용한 접근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읽고 쓰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을 써본다.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학교가 있는 이유는 학생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은 학교에 다님으로써 학생 스스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받고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할 20, 30년 뒤의 미래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유엔미래보고서 2050'이라는 책에 의하면 2050년까지 '로봇, 인공지능, 만물인터넷, 드론, 자율주행자동차, 태양광에너지, 나노기술, 합성생물학, 3D 및 4D 프린팅, 개인화된 온라인학습, 블록체인, 아직 알려지지 않은 기술들이 서로 만들어낼 집약과 시너지, 재교육을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기술 변화의 가속화 등'에 의해 현재의 많은 일자리들이 대체될 것인데, 현재 존재하는 일자리의 80%가 15년 안에 사라지고, 현재 초등학교 6학년 학생 중 65%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또 미래를 준비하는데 먼저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 나라나 기업에서는 소통과 창의성, 비판적 사고, 협업의 기술을 갖추고, 적응성, 회복력과 기개, 지속적으로 배우려는 사고방식을 갖춘 인재를 기르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학교의 모습은 어떤가? 그러한 기술들을 가르쳐야하는가? 아니면 미래를 잘 준비하도록 하고 있는가? 변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변화를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선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학교는 어떤 시선을 갖고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을 위해 앞서 준비하고 먼저 걸어가 위기가 아닌 기회를 맞이하도록 할 것인가?
너무나 거창한가? 아니면 원론적인가?
학생이 있기에 존재하는 학교가 학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생이 바르게 성장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도록, 학생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과 교육과정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이 정치꾼이나 학자들, 이익집단의 난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념적 편향이나 분당분파적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지배되는 교육 일체는 지양되어야 한다. 특히 미래 사회를 살아야할 학생들에게 현실에서의 유행에 따른 실험적이고 선언적 이벤트가 교육의 진리인양 포장되고 섣부르게 투입되어서는 곤란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래 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이 학교교육을 통해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학교와 선생님은 그 고민의 결과를 교육과정과 수업에 반영하여 지도해야 한다. 특히, 학교는 학생이 배울 학급 및 교과교육과정을 계획하여 직접 가르치고 안내하는 선생님에게 좀 더 적극적인 지원과 시간과 존중을 보장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배려와 공감, 이해가 바탕이 된 학교 문화가 정착이 되도록 학교장을 도와 학교를 운영하는 관리자로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최근 상영되었던 영화 중 회자되는 한 대사가 생각난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윤종권 산내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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