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기 호계초 교사 |
6학년 1반 교탁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빠르게 로그인을 한다. 업무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우리 반 남학생 하나가 쪼르르 다가온다.
“쌤, 어제 대청호까지 자전거 타고 다녀왔는데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얼마나 더웠냐면요….” 녀석의 무용담이 10분 가까이 계속된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선생님 일해야 하니까 친구랑 놀아라”하고 면박 줬을 것이다. 그러나 하던 일을 멈추고 잡담을 나눈다. 이야기를 다 풀어놓은 뒤에야 그 학생은 개운한 얼굴로 도서실에 간다. 비만이 심해져 요즘 고민이 많은 아이다. 그런 녀석이 운동을 시작했다니 기특하여 웃음이 나온다.
재빨리 공문을 해치우고 나니, 벌써 아홉 시다. 쉴 틈 없이 학생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온다. 아침 인사를 나누자마자 한 여학생이 볼멘소리를 한다.
“쌤, 토요일에 할머니한테 핸드폰 빼앗겼어요. 저 이제 어떡해요?”
평소에 스마트폰만 붙들고 살던 아이다. 불만을 듣다 보니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친구들이 “뺏길 만했네”, “어젠 일찍 잤겠구만”하고 반응한다. 그러자 그 학생은 스스로 지나쳤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만 숙인다.
다른 여학생이 잡담을 풀어놓는다. 남동생이 아침부터 말을 안 들어서 속상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맞벌이에 저녁 늦게 퇴근하는 집안이라 동생을 챙기다시피 하는 학생이다. 수업 시간이 5분 지났지만 그 아이의 고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가 호응해주니 다른 아이들도 동생 돌보기가 어렵다며 고충을 공감한다.
우리 교실의 아침은 늘 이렇다. 아이들이 꺼내놓는 잡담은 점심시간에도 계속된다. 아이들의 사연을 듣노라면 밥숟갈을 입에 넣는 것도 잊어버린다.
가정에서 치이고 선후배 사이에서 쌓인 갖가지 아픔이 튀어나온다. 6학년답지 않게 제법 심오한 고민을 하는 학생도 있다. 퇴근 무렵엔 학생에게 건네받은 이야깃거리가 한 보따리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학생들을 처음 만난 얼마 동안, 나는 그들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 하급생을 때린 탓에 불려와 발발 떠는 녀석에겐 “네가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랬겠냐”라고 어깨를 다독여주었으며(녀석은 그날 서럽게 울었다), 다른 어른에게 꺼내지 못할 이야기가 나올 때면, 괜히 선생이랍시고 고리타분한 충고를 하기보다는 그저 공감해주었다.
그런 뒤에야 학생들이 비로소 하나둘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혹자는 아이들을 너무 풀어주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학생의 행동에 낱낱이 잔소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 입장에서 감정을 일일이 공감하는 것도 같은 수고가 든다.
둘의 차이는 결국 잡담으로 나타난다. 관계(Rapport) 형성이 되고 나면 시시껄렁한 이야기 가운데 마음속 고민이 딸려 나온다. 일대일 면담으론 알 수 없는 깊은 애환이 학생 입에서 저절로 꺼내진다. 그렇기에 나는 수업 시간이 되었어도 업무에 파묻혀도 학생들의 잡담을 흘려들을 수 없다.
그걸 차단하는 순간, 아이들의 마음도 닫힐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학생의 형편을 속속들이 파악하여 세심하게 지도하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잡담이 살아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잡담은 교사가 주도하는 게 아니다.
두터운 관계 형성에서 비롯되는 학생의 수다를 교사가 귀 기울여 듣는 데서 출발한다.
독자 중에 십 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문해보자. 평소 자녀가 잡담을 늘어놓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그동안 귀찮고 바쁘다며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오늘부터는 어른의 '일 중심적 사고'를 내려놓고 자녀와 '관계 지향적 잡담'을 나누어보는 건 어떨까.
박상기 호계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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