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필자가 젊을 때 썼던 시를 후배가 자료실에서 찾아 보냈다. 20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의 마음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다르지 않아서 신기했다. 걸핏하면 “ 그 때는… ”이라 하면서 지금과 다른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리기 일쑤였는데 실제로는 그제나 이제나 비슷한 생각 속에 살고 있나 보다. 하긴 마사 로저스(Martha Rogers)란 간호학자에 의하면 사람의 행동은 일정한 패턴을 이룬다. 다시 말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구글 신(神)이나 네이버 씨(氏)에게 물으면 된다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지난 주 다녀온 여행길에 들렀던 독일의 퀼른 대성당에 대해 들은 설명을 모두 잊어버렸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인터넷 창에 '퀼른'만 넣어도 이런 저런 자료가 가지를 치며 끝도 없이 연결되어 나온다. 멋진 세상이며 한편 겁나는 세상이다.
성당 근처 호텔에 묵었기에 선배와 함께 다음 날 아침 산책길에 다시 성당에 들렀다. 이른 아침 성당은 더없이 고요했는데, 어둡던 성당 안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색깔마다 다른 햇살로 밝아지기 시작하면서 깨어남의 잔잔한 감동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필자도 감사 기도를 올리고 말았다. 살아서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모두 감사한 일 아닌가.
게다가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눈으로 먼저 음미하는 여유도 보였고, 두 번이나 성당에 앉아있을 수 있었고, 오르간 연주도 들을 수 있어 운이 좋았고, 오며 가며 선배와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참 잘하지 않았는가. 온전히 독특하게 자기 자신에게 남는 것은 그 때 그 곳에 간 일 자체가 아니라, 그 때 그 경험을 통한 자기 느낌, 감각, 생각 그것뿐이니 말이다.
인간은 고유한 존재이고, 각 개인은 나름의 독특성으로 유일무이하다. 그러니 무엇이든 안다는 구글신(神)도 네이버씨(氏)도 인간의 내적 독특성을 모두 알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이런 고유성을 인정 받아야만 인격적으로 존중받았다고 느끼고, 누군가 내게 맞추어 공감해줄 때에야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소통하는 편안함을 얻게 된다.
여행길, 한 간호대학에 들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에게는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외상이나 뇌출혈 등으로 의식이 없는 환자를 깨우기 위해 어떤 자극(stimulation)을 어떻게 주어야 효과적인지 고민한다는 독일의 간호에 대해 들으며 인간의 고유함과 이를 알아주는 돌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의식 환자를 깨우기 위해 보편적으로 주는 자극을 쓰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면서도 그 사람이 좋아하고 익숙한 자극을 찾는다는 것이다. 안개 낀 듯 흐릿한 의식 상태에서도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것을 끌어내는 간호를 하기 위해 세밀한 정보를 얻으려 애쓴다는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이를 활용하는 돌봄이 진정한 간호라고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여행길이 고단했지만 의미가 컸다.
내 삶은 나밖에 모른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고 살지 말자. 나밖에 모르는 삶을 서로 알아주고 나누는 삶을 살자.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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