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라요. 우리 아버지와 그리고 국군이 그곳에서 어떤 전투를 벌였는지. 동락전투 하면 김재옥 여교사만 기억하죠. 전쟁이 승리함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에서 피 흘리며 싸운 군인들의 이름은 존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일까요.”
아버지 이름 앞에서 환갑을 넘긴 아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대전국립현충원에서 만난 김병한씨가 아버지의 묘비를 닦고 있다. |
66년전 충북 충주에서 있었던 동락전투
장소는 아버지가 계신 현충원이 좋겠다는 김병한 씨(63·대전)의 의견을 따라 대전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아버지와 동락전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겠노라며 익숙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앞서간다.“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1950년 7월7일 육군 6사단이 충주 음성지역에서 방어명령을 받아 대기하던 중 동락전투가 발생했죠. 사단 병력(3000여명)을 가지고 있던 북한군에 비해 우리군은 너무나 미약한 4대 중대(300여명)뿐이었죠. 하지만 남한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첫 승리를 바로 충주에서 이뤄냈어요.”
동락전투의 시작은 충주지역을 점령한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에 진영을 풀면서 시작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재옥 여교사는 피난도 포기한 채 학교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는데 북한군이 학교로 내려오자 기지를 발휘한다. 남한군이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여교사의 말을 믿은 북한군은 무장해제되고 만다. 북한군을 안심시킨 여교사는 바로 남한군이 있는 4km를 홀로 걸어와 상황을 전달했고 김병한 씨의 아버지 김상흥 대위와 6사단은 바로 공격을 시도했다. 이 전투로 북한군 2000여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1950년 당시 동락전투 상황도. |
“아버지는 6사단 돌격 제5대 중대장으로 특공대 30명을 지휘하셨어요. 아버지가 전투마다 그 지역출신을 뽑아서 팀을 꾸렸는데, 지형에 능숙하다는 강점을 잘 알고 계셨던 거죠. 아버지의 날카로운 안목이 충주가 함락되지 않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비석을 닦으며 김병한 씨는 동락전투의 값진 승리가 후세에 퇴색됐음을 안타까워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에서도 김재옥 교사가 주인공이고, 동락초등학교에 세워진 김재옥 교사 기념관도 한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요즘 학생들은 6.25가 뭔지도 몰라요. 겨우 알아야 인천상륙작전이나 낙동강 전투를 시험을 위해 무의미하게 외울 뿐이죠.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피 흘리며 나라를 지킨 그분들의 힘이었음을 학생들에게 교육해야죠. 아버지와 그날의 무명용사들을 위해 꾸준히 동락전투를 알리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작년 새로 세워진 동락전승비. 동락초등학교 앞쪽에 있다. |
성역화 된 동락전투지, 여전히 남의 이야기?
16년째 동락초등학교에서는 매년 7월7일 전승기념행사가 열린다. 최근 전승지가 성역화로 승격되면서 전승비가 교체되는 괄목한 성과가 보도되기도 했다. 또 1950년 당시 전투를 목격했던 지역 주민이 인근 땅을 국가에 헌납하는 등 전승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기념행사는 매년 개최되고 있어요. 충주지역에서는 워낙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꾸준히 보도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봐요. 그때 만약 충주가 뚫렸다면 현재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을지는 미지수죠. 동락전투가 특정지역의 이야기나 행사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역사교육과 반공의식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죠.”
동락전투를 들여다보며 세상에 나오지 못한 6.25 이야기는 얼마나 많을까. 또 전투에 참여했던 한명 한명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얼마나 애달플지 곰곰이 생각게 된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오빠였을 그들의 이야기. 동락전투와 함께 세상으로 한발 나올 수 있도록 국민적인 공감과 관심이 필요하다.
▲매년 7월7일 동락초등학교에서는 전승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올해로 16년을 맞았다. |
“내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후회없이 헌신 하신 분이셨어요. 매일 아침 명상을 하는데 아버지와 군인들이 온 몸으로 지켜낸 땅에 살고 있음이 너무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현충원을 찾아온다는 김병한 씨는 나이 지긋한 60대가 됐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어린시절과 똑같은 마음이라 했다. “내가 직접 번 돈으로 고기 한근 못 사드린 것이 가장 죄스럽지…” 카메라가 꺼지자 대한민국 평범한 아들로 돌아온 그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고요한 현충원에 메아리쳤다. /이해미 기자
*김상흥 유공자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충주 동락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1968년 ‘김신조 사건’이 발생하자 지역 향토예비군 창설을 청와대에 건의했다. 전쟁 당시 맞았던 총탄이 너무 많았던 탓에 혈액순환이 불가능해졌고 47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1996년 국가유공자로 등록됐고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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