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권 목원대 총장 |
그가 어렸을 적엔 개미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곤충들을 장난감 삼아 갖고 놀다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사실, 옛날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닭을 잡아 오라면 닭장에 가서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닭의 목을 비틀고, 털을 뽑고, 내장을 긁어내는 일을 척척 해내는 경우도 있었다. 개미 따위를 밟아 죽이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른이 시키는 일인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린 아이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이런 차이는 무엇보다도 문화의 차이에서 나온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적에도 개미를 의인화한 우화가 없진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우화를 소개하는 책의 삽화로 나오던 개미는 오늘날의 수많은 만화영화의 캐릭터로 등장해서 사람처럼 행동하는 개미와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개미를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개미 하나를 두고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엔 이미 건널 수 없을 만큼의 인식의 차이가 형성되는데, 그것을 만든 게 바로 문화다. 이른 바 세대 차이는 곧 문화의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만약 할아버지가 손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의 관점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바로 닫힌 마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 강요에 대해서는 그냥 따르거나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두 가지 방식의 반응이 가능할 것 같다. 할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것은 할아버지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이 될 것이고, 문화는 손자 대에서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정체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손자 세대가 옛것을 그대로 계승하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긴 하겠지만, 문화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관점이 합리적인 것이라면 문제될 것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불합리한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지키는 불편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존 램비(John Lambie)는 비판적으로 열린 마음이란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이 교대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말한다. 열린 마음이 지배하던 시대는 학문과 제도가 발전하고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기록된 역사서가 존재하는 반면, 닫힌 마음이 지배하던 시대는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조명한 이렇다 할 서적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닫힌 마음이 지배하는 시대는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로,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전의 관행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문화가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적과의 대치와 같이 긴급함을 요구하는 경우엔 닫힌 마음이 효과적일 때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닫힌 마음은 그 폐해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중세의 유럽처럼 한 시대를 암흑기로 만들기도 했고, 히틀러에게서 보았듯이 역사를 한참 퇴보시키기도 했으며,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마지막 순간까지 묵살함으로써 자국민 2000만 명을 전쟁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닫힌 마음은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닫힌 마음이 초래하는 온갖 불합리한 것들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그런 것들을 바꾸기 위해 온건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닫힌 마음을 공격하는 사람 역시 닫힌 마음으로 무장하고 상대를 모질게 비판하기 쉽다. 닫힌 마음에 대한 저항이 또 다른 닫힌 마음을 가져옴으로써 닫힌 마음에 대한 비판이 그 명분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교육은 무수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닫힌 마음이 뿌리내리지 않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비판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것 아닐까?
박노권 목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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