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단 30일, 호국정신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한 달이 지나갔다. 증기기관차3-129와 딘 소장, 그리고 김재현 기관사를 통해 우리는 6.25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껴봤기에 지난 한달이 우리에게 소중함을 깨달았다. 6월과 증기기관차 미카를 보내며 66년 전 미카가 달렸을 대전의 터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옛 구정리터널로 가는 길. 옛 철길은 모두 텃밭으로 바뀌었다. 동그라미 부분이 터널 입구다. |
66년을 거슬러 올라가니 상처와 시간이 고스란히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를 촬영했던 6월의 어느 날, 판암차량기지에서 나와 차로 2분 정도 달렸을까. 옛구정리터널 인근에 도착했다. ‘옛구정리터널’이라 부르는 이유는 현재는 신 터널을 통해 열차들이 운행되고 있고 옛 터널은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기 때문이다.▲10m는 채 되지 않을 터널 내부. 까만 어둠을 품고 있다. |
옛구정리터널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터널로 가는 길을 찾아봤다. 멀리 신 터널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온통 초록의 밭이었다. 얼핏 검은 구멍이 보이는 듯 했지만 도대체 어디에 길이 있는 건지 미로 찾기와 별반 다름없었다. 결국 땡볕 아래서 잡초를 뽑는 어르신의 도움을 구해야했다. 사실 두어번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길에서 다다랐고, 우거진 수풀 앞에서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과거로 거슬러 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예고 없는 방문에 오래된 터널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르신의 안내에 따라 아랫길로 내려가 작은 개울을 건너니 터널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나타났다.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 1950년으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한 설렘이 공존했다. 좌우로 펼쳐진 밭. 무얼 심었는지 아직은 모르겠는 작물들이 6월의 태양 아래서 자라고 있었다. 무심코 걷다보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오래전 철길임을 깨달았다. 잡초가 무성하게 길을 덮었지만 곧게 난 길은 저 멀리 터널과 이어졌다. “와, 여기에 터널이… 66년 전으로 걸어왔네.”
▲터널 안에서 바라본 세상. |
상행선 역사적 가치 충분, 하행선은 주민의 품으로
곧은길을 따라 멈춰 선 길. 아치형 모양의 터널이 공허하게 뚫려 있고 나를 집어 삼킬 듯이 옛구정리터널은 까만 어둠으로 가득했다. 다가갈수록 차가운 공기들이 밀려온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주 먼 시간으로 순간이동 시켜줄 것만 같은 뭔가 차원이 다른 세상.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터널 안으로 들어가 봤다. 순간이동은 없었지만 1950년 6.25의 흔적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도대체 몇 발의 총탄이 날아와 박힌 것일까. 부서진 돌벽의 상처는 셀 수 없이 많았다.옛구정리터널은 두 곳.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나뉘는데, 상행선은 정돈이 제법 잘 되어 있었다. 물론 인근 농부들의 쉼터가 되었지만 전쟁의 참상도, 오래된 기차 터널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다.
▲ 하행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민의 텃밭이자 곡식 저장고로 변한 구정리터널. |
텃밭을 가로질러 하행선 터널로 향했다. 하행선의 경우 상행선과는 반대로 터널 입구 앞까지 텃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터널 내부는 주민들의 천연 냉동고로 전락해 있었다. 마늘부터 각종 작물들이 널려있었고 간간히 쉴 수 있도록 나무 의자도 놓여 있었다. 기차가 달렸을 법한 흔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쉽지는 않았다. 역사적 이슈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니었으니… 다만 사라지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터널은 아주 오래 그곳에 있었다.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비록 신 터널에 자리를 내주고 그 명성은 잃었지만 사람도 세상도 이 길을 통해 많은 것이 변해왔음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구정리라는 이름은 남아 있었다. |
옛구정리터널은 6.25와도 인연이 있고 대전과 충북, 멀리는 부산까지도 잇는 소중한 길이었다.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만큼 더 이상 훼손 없이 이대로만 보존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역사는 잊히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잊을 뿐.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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