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티 이미지 뱅크 |
이른 아침 시내버스에 올랐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내미 학교의 학교운영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차들이 많아 제 시간에 참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시내버스는 버스 전용차로가 있기에 막힘없이 달릴 수 있어 늦을까 조바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에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곤 한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젊은 엄마가 가슴엔 갓난아이를, 손에는 어린 아들을 잡고 힘겨운 모습으로 버스에 오른다. 삶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일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르자마자 앉을 자리를 찾는다. 마침 앞좌석에 앉아있던 청년이 자리를 내어준다. 고맙다는 인사는 엄마의 손에 잡힌 어린 아이가 먼저 했다. 엄마도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며 뭐라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넨 아이가 영리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그의 눈동자에서 풍기고 있었다.
뒤이어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에 오른다. 일흔 살이 좀 넘었을까하는 할아버지는 미간 사이에 세로 주름이 깊게 파져 있었다. 세월의 굴곡(屈曲)을 많이 겪으신 듯 했다. 두리번거리셨지만 자리가 없다. 누군가가 또 일어서야만 한다. 그런데 모두들 다른 곳을 보거나 스마트 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스마트 폰의 효용이 이런 경우에도 나타날 줄이야.
뒤쪽에 앉아 있는 나는 누군가가 앞에서 자리를 양보해 드리기를 바라며 그럴만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일어설만한 사람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한 명. 할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던가? 학생이 앉아 있는 좌석 옆에 서서 학생이 일어나주기를 바라고 계신 모습이었다. 그러나 학생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있는지 할아버지께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두 정거장쯤 지나고 있었을까? 서 계시기가 힘드셨던지 할아버지께서는 들고 있던 합죽선(合竹扇)으로 학생의 머리를 툭 치시며 “얼른 일어나지 못해! 어른이 탔으면 일어나야지. 요새 젊은 것들은 도대체 뭘 배운 거야?”라고 하시며 학생을 꾸짖으셨다.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학생은 멋쩍은 듯 일어나 하차벨(下車 bell)을 누르고 정거장에 도착하자 내려 버린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아마 그가 절뚝거리며 내린 정류장은 분명 목적지가 아녔을 것이다. 왠지 안쓰러워 보였고 할아버지가 밉게만 보였다.
경로사상(敬老思想)은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다. 하지만 ‘경로’의 대우를 받는 데에는 어르신다운 언(言)과 행(行)이 수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격히 말하면 ‘경로’는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인 것이다. 권장은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 즉 자발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할아버지는 학생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절뚝거리며 내리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도 그 학생은 버스에서 일어났던 그 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심리적 갈등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다리로 서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학교에 가면 밤늦도록 공부에 시달려야 하는데. 온종일 자유롭게 활동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할아버지는 손자도 없나? 절뚝거리는 손자가 그렇게 시달린다면 그런 손자를 위해 어떻게 하실 건데.’
물론 학생이나 할아버지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버스나 전철을 이용할 경우 노약자석이 비었다 해도 왠지 선뜻 앉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갈 때면 정류장마다 누가 타는지 신경이 쓰인다. 노약자란 노인들만의 대명사가 아니다. 젊은 아이 엄마나 누구라도 몸이 불편한 상태라면 모두 ‘노약자’란 집합에 해당한다. 나 또한 몸이 천근만근 피곤할 때가 있다. 빈자리가 있으면 염치를 불고하고 앉고 싶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재돼 있는 양심과 도덕심이 나를 가로막는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배려와 양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강요는 반감을 일으킨다. 자발적인 동기부여가 더욱 바람직하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학생, 내가 늙어서 오래 서 있기가 힘들어. 괜찮다면 미안하지만 나에게 자리 좀 양보해 줄 수 없을까?"라고 하셨다면 아마도 그 학생은 미리 자리를 내드리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본을 보이는 것이며 아랫사람에 대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100세시대가 열리면서 앞으로 젊은이들 보다 노인 인구가 더 많아질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생산가능 인구 6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5세 인구 비율이 10%대에 육박한다고 했다. 이것은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신호탄이다. 이러한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인 공부보단 어른들이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 청소년들은 청소년다운 청소년이 될 것이다.
문득, 플라톤의 명언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것이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오늘도 복잡한 버스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건질 수 있는 보람된 하루였다.
/김소영(태민) 시인
▲ 김소영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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