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갑종 백석대 총장 |
수년 전에 용서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상영된 적이 있다.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주인공에게 여우주연상까지 받게 해 준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신애(전도연)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땅 밀양에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열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한다. 하지만 신애는 낯선 땅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이 유치원원장으로부터 유괴당하여 죽는 참혹한 사건을 겪게 된다. 신애가 남편과 어린 아들을 잃는 슬픔을 안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중 이웃의 권고로 기독교에 귀의(歸依)하게 된다. 신애는 교회에 다니면서 사랑과 용서에 대한 설교와 가르침을 받고 차츰 마음에 안정을 되찾게 되고, 아들 준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침내 신애는 큰 결심을 하고 감옥에 갇힌 살인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감옥에서 만난 살인자는 환한 얼굴로 신애에게 자신은 이미 신(神)으로부터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살인자의 당당한 말을 듣고 신애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신애의 의문점은 이것이다. 정작 살인자의 죄를 용서하여야 할 피해자는 자신인데 피해자인 자신의 용서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해자가 자신과 상관없이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신은 피해자인 인간의 용서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신애는 이 일로 이렇게 일방적인 신의 용서를 주장하는 기독교라면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등지고 용서의 마음을 닫아버린다. 주인공 신애가 제기한대로 기독교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가? 수직적인 신의 용서는 수평적인 사람의 용서 없이도 가능한가? 주인공의 아들을 죽인 그 살인자는 신애로부터의 용서 없이도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인가?
신약성서에 보면 용서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가 나온다(마 18:23-35). 이 이야기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형제자매가 나에게 죄를 지을 때 왜, 그리고 몇 번 정도 그를 용서에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졌다. 3막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수직적인 신의 용서와 수평적인 사람의 용서는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수평적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자는 실제로 수직적인 신의 용서도 주어지거나 체험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영화 밀양으로 돌아가 보자. 신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진정으로 용서를 필요로 하였다고 한다면, 피해자인 신애를 만나자마자 먼저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진지하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신애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 살인범이 신애가 찾아오기 전에 이미 신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의 용서는 당연히 신애로부터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용서는 진정한 신의 용서가 아닌 자신이 최면적으로 만든 가식적인 용서에 불과하다. 살인자의 잘못된 용서에 대한 생각이 결국 신애의 소박한 신앙을 망가뜨리고 신애를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영화 '밀양'은 신애가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여 과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였는가에 관한 의문을 남겼다. 신애가 기독교에 귀의하여 신 앞에서 자신도 죄인이며, 신의 용서를 필요로 한 자라는 것과 그리고 신으로부터 실제로 용서함을 받은 자였다고 한다면, 신애가 만난 그 살인자가 자신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였든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밀양'은 어떤 점에서 미완성의 영화이다. 영화가 용서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에 대한 답을 만들 것을 촉구한다. 거듭 말하지만 수직적인 신의 용서와 수평적인 사람의 용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람의 용서는 신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징검다리다.
최갑종 백석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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