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성준 하사, 고 임병근·정인초 일병
현충관서 영결식 후 장·사병 제4묘역에 안장
‘현충(顯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말한다. 이들은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이들의 ‘현충’이 없었다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다.
6·25 한국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국군장병 유해 3위의 합동안장식이 엄수됐다. 2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다. 안장식에는 유가족과 보훈단체, 장병 등 200여명이 참석해 영웅들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다.
영면에 들어가는 선열은 고 정성준 하사와 고 임병근 일병, 고 정인초 일병 등 모두 3명. 이들의 유해는 화천, 양구, 장진 등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현장에서 발굴됐다. 조국을 위해 전투에 나선 이들은 20살 안팎의 꽃다운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고 정성준 하사는 1950년 9월 청도 피난길에 나섰다가 9사단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 이후 정 하사는 사창리 전투(1951년 4월 21~25일), 용문산 전투(1951년 5월 18~20일) 등에 참전해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1951년 8월 화천지구 전투에 참가했다가 고지쟁탈전 도중 장렬히 전사했다.
고 임병근 일병은 1950년 8월 미군 카투사로 입대했다. 당시 임 일병도 20살이었다. 그는 그해 11월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미 해병 1만5000명 중 4500명이 전사한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전투 중 하나다.
임 일병이 속해 있던 미 7사단 31연대는 당시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돼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공군 7개 사단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았다. 임 일병은 12월 6일 목숨을 잃었다. 이 기간 동안 전사자는 561명, 실종자는 182명에 이른다.
고 정인초 일병(당시 21살)은 1951년 7월 입대했다. 그는 8사단 일원으로 그해 10월 강원도 어은산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어은산에선 전략적 요충지였던 백석산 탈환을 위해 양군의 치열한 싸움이 치러졌다.
합동안장식은 영결식과 영현봉송, 안장식의 3단계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영현에 대한 경례와 조사, 종교의식, 헌화·분향, 조총발사, 하관·허토 순으로 진행된 안장식에 최고의 예우로 호국영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김해석 육군 인사사령관은 조사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며 “오직 조국과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만큼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 영혼으로 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임병근 일병의 친조카인 임충식(61)씨는 허토 후 “마음이 너무 뭉클하다. 작은아버지를 지금이라도 이렇게 현충원에 모실 수 있어서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행복하다”며 “국가에 감사하고, 고인을 이렇게 나마 뵐 수 있고 자랑스러운 분을 모시게 돼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 현충원에는 현충일 노래가 나지막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겨레와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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