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
퍼스널 컴퓨터가 막 나오던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데이터 정리하고 다른 논문 짜깁기해서 전동타자기(당시로서는 첨단이었다)로 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를 원고지에 써서 교수님께 제출하면 몇 글자만 바꾸어도 처음부터 원고지를 다시 메워야 했다. 낮에는 맡은 일을 해야 하니 밤에 작업을 할 수밖에 없어 당직이 아니어도 집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옆에서 보는 동료들도 마음이 안 됐는지 한두 마디 위로의 말을 전하곤 했는데, 화교 출신인 동료 맹번정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형님! 설렁설렁 하세요. 중국속담에 '천하의 모든 문장은 다 베낀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힘든 시절이었기에 그 말이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올 수 없었고, 지금도 그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인류 역사에서 나만의 아이디어를 독자적으로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지만 융합의 걸작일 뿐이다.
학자들 중에 다른 사람의 결과를 인용하지 않은 사람은 비트겐슈타인과 아인슈타인뿐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현대철학을 연 새로운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무명 시절, 한꺼번에 4개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최초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논문과 광학(光學)의 시초라고 인정받는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특수상대성 이론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용 논문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세기의 천재'라고 부른다.
결국 우리는 남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 다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시장에서 좌판 깔고 장사하는 사람부터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마찬가지다.
정보가 부족하던 지난 수천 년 동안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권력도 함께 가졌다.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보의 양은 이제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정확한 정보를 빨리 아는 사람이 승자가 되었다. 이제는 스티브 잡스와 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구슬'을 잘 꿰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세상은 AI의 시대다. 며칠 전에는 'AI가 미국의 로펌에 취직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가 나왔다. 많은 학자들이 제시했던 '수많은 실업자'가 생길 것이라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우려가 이미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인문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많은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교와 학생이 줄어들고 있고, 문과를 전공한 대학생이 취직하기 힘들어지면서 '문송(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 방문 시 상대국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썼던 '루사리'를 두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상대국과 소통하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는 사람들과 '대통령이 굴복하고 들어갔으니 나라 망신 시켰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었다. 이들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이것이 소모적인 싸움이 아니라 논쟁을 통해 이슬람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정세를 파악하면서 지도자의 자세에 대한 생각을 다듬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인문학적 사고를 통한 개인의 발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달리 방법이 없다면 인문학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리고 AI가 아무리 세상을 바꾼다고 해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결국은 모든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역지사지… 참 어려운 일이다.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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