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티 이미지 뱅크 |
작년 여름 몇 개월 동안 인사동에 볼 일이 있어 지나다닌 일이 있었다.
낙원 상가 옆 파고다 공원을 지날 때마다 눈에 띄는 모습. 그것은 신경이 날카로워져가는 갱년기에 접어든 여성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정경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어느 노인은 찬 길바닥에 누워 자고 있고, 어느 노인은 앞에 플라스틱 그릇을 놓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왜 멀쩡한 몸으로 저러고들 있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지나가다 손 내미는 노인들에게 아무말 없이 그냥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준다. 김유정(金裕貞) 작가가 쓴 현대소설 만무방에 나오는 주인공 응칠이를 알고 나서부터다.
응칠이는 본래 역마살(驛馬煞)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으며 집도 있었다. 밤마다 아내와 마주할 때마다 어찌하면 이 살림을 좀 늘려 볼까 애간장을 태우며 갖은 궁리를 하던 인물이었다. 농사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추수가 끝나면 남는 건 남의 빚뿐, 이러다가는 빚더미에 묻혀 죽게 될 것이 뻔했다.
응칠이는 밤이 깊어서 코를 골며 자는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그의 전 재산 내력을 바람벽에 적은 다음 조선글로 「나의 소유는 이것밖에 없노라, 나는 54원을 갚을 길이 없으매 죄진 몸이라 도망하니, 그대들은 아예 싸울 게 아니겠고 서로 의논하여 억울치 않도록 분배하여 가기 바라노라」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벽에 남겼다. 현대판 파산선고(破産宣告)인 것이다. 그 후로 응칠이는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던 것이다. 당시에 조선글만 쓸 줄 알았어도 상당한 지식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여기, 파고다 공원에 누워 자거나 구걸을 하는 노인들, 사정은 각각 다르겠으나 필경은 응칠이와 같은 처지 때문에 그렇게 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족과 헤어지며 삶의 보금자리를 떠날 때 얼마나 막막하고 서글펐을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인가는 하고 싶었고 어쩌면 저들이 응칠이 신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저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갱년기 주부가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울증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남편은 그런 나를 지켜보며 내 뜻에 따라주었다.
▲ 김소영 시인 |
‘태민표 곰국’ ‘태민’이는 나의 또 다른 애칭이다. ‘태민표 곰국’은 태민이가 직접 조리하겠다는 상표다.
‘태민표 곰국’으로 저분들과의 대화를 나누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준비하는 한 달 내내 마음고생이 뒤따랐다.
"혼자서 100인분의 밥과 국을 준비하게 되면 힘들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요"라고 경험을 조언해 주시는 어느 목사님과, 영업에 방해된다는 파고다 공원 주변 식당의 반대로 곰국은 접어야 했다.
'하지 말아야 하나? 그만둘까?'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 "엄마, 엄마가 하려는 일은 누가 뭐래도 남을 위한 좋은 일이잖아. 그럼 그냥 하는 거야. 엄만 언젠간 할 사람이잖아.. 해야 한다면 지금 해. 힘을 내라구." 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딸이 힘을 실어주었다.
“어묵과 김밥으로 하면 어때?‘ 갱년기를 염려스런 눈으로 지켜보던 남편이 창의적인 생각을 보태주었다. 고맙다. 엄마를 이해해주는 딸이 고맙고, 늘 조용한 눈으로 지켜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래 행복이란 바로 이것이야. 가족들끼리 촘촘하게 올을 엮어 사랑의 천을 짜는 것.
'그래, 따뜻하게 데운 어묵과 김밥으로 시작하자'
김밥 100명 분과 캔어묵 100명 분을 준비해 스치로플 박스에 넣어 온도를 보존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다. 첫날은 무질서 속에 김밥과 어묵 나눔이 시작 됐다. 공짜라니까 서로들 받기위해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날 어떻게 지냈는지 정리가 잘 안 됐다.
그렇게 무질서 속에 시작한 것이 6월 19일이면 9번째가 된다.
"어디서 나오신 겁니까?", “우리들에게 뭘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라며 처음엔 매스컴이나 타려고 하는 단체는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던 사람들이 이젠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알아서 미리 줄도 서 계시며, 차례가 늦어 못 받으신분들을 위해 자신들이 받은 어묵이나 김밥을 나눠드리는 분도 계셨다. 비록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떠도는 신세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함이 내재 돼 있었다. 순간 콧날이 시큰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동안 흘렸던 눈물의 DNA가 바뀌는 것 같았다. 왜 저 어른들을 ‘노숙자’라고 구분지어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부정적이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나를 도와주시고 계신 모든 분들과도 이런 감동을 나누고 싶었다.
가족이 고맙고, 동참해 주시는 이웃들이 고마웠다. 세상은 그래도 따뜻하다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엄마의 엉뚱한 행동에 힘을 보태고, 아내의 생각지 못한 행동에 몇 십만 원의 돈을 선뜻 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여인의 행동에 동참해주는 이웃들이 고마웠다.
기다려진다. 6월 19일!
우리 가족과 함께해주는 이웃들과 그리고 도착하기 전에 줄을 서서 기다려 주시는 노숙자 어르신들. 그 분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엮어 한 올 한 올 사랑의 옷감을 촘촘히 짜 보자.
행복은 베풂에서 온다하지 않았던가?
/김소영(태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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