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지나자 전국서 찾는 지역대표 건강문화축제의 길로
14일엔 맨발도장 찍고 황토마임 등 문화체험, 15일엔 마사이마라톤 대회
“이게 엄마 잘못은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냈으니 간이 굳고 장기가 막힌 거지. 수술은 해봐야 안다니까….”
땅이 쩌억 갈라져 있다. 가엔 흙이 말라 백발처럼 하얗다. 나뭇잎 사이 햇볕을 그대로 받아낸 까닭이다. 밟자니 가시처럼 따갑다. 흙은 몸을 뚫지 않는다. 빡빡한 두 걸음. 모녀사이 같은 늙은 세 여자가 서로 팔을 끼고 함께 걷는다.
이번엔 바람 차례다. 나와 당신,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지 않나. 바람은 소리로부터 먼저 왔다. 바람이 나무기둥을 휘감고 돌아 올라가 잎을 매만진다. 잎은 가만히 떨리거나 서걱인다.
'왔구나' 싶은 그때 짧은 바지 밑으로 드러난 발목에 바람 스친다. 지나는 계집아이 귀밑머리 흩날린다. 하늘을 바라봤을 땐 이미 늦었다. 바람은 벌써 지상을 훑고 지나가 제 온 자리로 가려고 신록의 마지막 하늘 끝 잎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가시는구나.'
53년 전 세상을 등진 이양하(李敭河)는 40대 중반에 발표한 '신록예찬(新綠禮讚)'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라고 썼다.
당대의 문장(文章)이 닭발 모양한 산, 붉은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가 맨발 판화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입구에서 순환임도까지 14.5㎞ 둘레길에는 차진 황토가 두텁게 깔려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뽑은 한국관광 100선, 5월에 꼭 가볼 만한 곳, 여행전문기자들이 뽑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선 등에 선정된 바로 그 '계족산 황톳길'이다.
계족산 황톳길의 처음과 끝에는 지역대표 소주 O2린을 생산하는 맥키스컴퍼니가 있다.
2006년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이 하이힐을 신고 계족산을 찾은 지인에게 운동화를 양보해 맨발로 걷게 됐고 맨발산행 뒤 남은 개운한 느낌을 혼자 누리기 아까워 산에 황토를 깔았다는 얘기가 기이한 전설처럼 회자된다.
14.5㎞ 둘레길에 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황토를 쏟아 부었고 이후 10년 동안 매년 황토를 채워 넣고 관리하는 데만 60억원 넘는 돈이 들어갔다는 것도.
여러 가지 흙 종류의 하나인 황토에는 수억 마리 미생물이 살고 있어 다양한 효소들이 순환작용을 한다. 또 동·식물 성장에 필요한 원적외선을 다량 배출하고 항균 및 독소제거 등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월 맨발축제를 전후로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계족산 황톳길을 찾아 차고 따스하고 무르고 딱딱한 황톳길 맛을 보고 간다.
첫날인 1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황톳길에서 맨발걷기와 더불어 황토머드, 황토마임, 페이스페인팅, 맨발도장찍기, 캐리커처 등 숲속문화체험행사가 이어진다.
둘째 날엔 '에코힐링(eco-healing) 마사이마라톤대회'가 펼쳐진다. 맨발로 계족산 황톳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13㎞코스다.
젊은이들의 참여를 확대하고자 29세 이하(1988년 1월1일 이후 출생) 시민과 외국인에겐 별도의 참가비를 받지 않는다.
올해도 수많은 남녀 건각(健脚)들이 서로 정답게 어깨 부딪치며 황톳길을 뛰는 장관이 연출된다.
안 그래도 유명한 계족산 맨발축제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건 맥키스오페라단(단장 정진옥)의 '숲속음악회'다.
클래식 음악에 개그와 마술 등 친근한 소재를 더해 누구나 편히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황톳길을 걷는 게 살짝 밋밋해질 즈음 산 중턱 야외무대에서 만나게 되는 바리톤과 테너, 맑은 소프라노는 그 자체로 '울림'이고 '치유'다.
지난 7일 오후 장동산림욕장 입구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느릿느릿 걸어 올라간 그곳에서 바윗돌 하나 차지하고 앉아 듣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걷다 마주한 것=귀 호강까지 하고나서 다시 황톳길을 밟아 내려간다. 울퉁불퉁한 길 여기저기 타인의 발바닥이 널려있다. 어리거나 젊고 늙었거나 어딘가 병든 것들이다. 그렇게 얽히고설켜 한 시대를 살아낸다.
애당초 언어란, 문장이란 잡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황톳길 오르며 하나라도 손에 쥐려 했던 텍스트(text)는 바람을 타고 새소리, 물소리 속으로 사라졌다. 머리를 가득 채운 해야 할 많은 일들과 정체 모를 분노, 불안감, 걱정도 함께. 오롯이 남은 건 처음 그때의 나였다.
문승현 기자 hey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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