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이렇게/엄마를 씹어먹어/삶아 먹고 구워 먹어/눈깔을 파먹어/이빨을 다 뽑아 버려/머리채를 쥐어뜯어/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가장 고통스럽게’
작년 이맘때 논란이 됐던 동시 ‘학원 가기 싫은 날’이다. 표현이 섬뜩해서 한동안 이 동시를 두고 매스컴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었다. 엄마를 씹어먹고, 구워먹고, 파먹고…. 피상적으로 보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싶을 정도여서 언론등 사회의 반응은 교육적으로 옳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일부에선 어린이의 가감없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 예술성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학부모들의 거센 비난에 출판사측에서 동시집을 전량 회수·폐기했다.
우리가 이 문제에서 간과한 것은 따로 있다. 시의 잔혹한 표현이 아니라 아이들이 처한 현실 말이다. 얼마나 학원 가기 싫었으면 ‘엽기스런’ 시를 썼을까 어른들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한다. 낮이나 밤이나 얼굴만 보면 공부, 공부하며 학원가라는 엄마의 성화가 아이들은 얼마나 지겹고 끔찍할까. 어른들은 왜 아이의 통찰력있는 시에서 잘못된 교육현실이나 사회 문제를 짚어내지 못할까.
우리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전두환에 대해 딱한번 눈물겹게 고마워한 적이 있다. 1980년 중 2때 전두환은 과외금지령을 내렸다. 그해 여름방학때 우리 학교는 보충수업을 하기로 했으나 갑작스런 과외금지령으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공부인데 방학때도 학교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학교가 워낙 멀어 학교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한겨울엔 컴컴할 때 집을 나서 30분을 걷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다음 또 버스로 20분을 가야만 했다. 그야말로 등하굣길이 전쟁 치르는 것과 맘먹었으니 말이다.
▲ JEI 재능TV 검정고무신 예고편 화면 캡쳐 |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친구랑 학교 가던 중 학교 가지 말고 딴 데서 놀다 집에 가자고 친구를 꾄 적이 있다. 친구도 솔깃해 하다 안되겠는지 그냥 학교가자고 해서 불온한 계획은 무산됐다. 그런데 친구가 그 얘기를 자기 엄마한테 일러바쳤다는 거다. 엄마도 그 사실을 알게 돼 덕분에 엄마한테 된통 혼났다. 우스운 건 그 친구가 공부는 못했지만 결석 한번 안했고 난 학교가기 싫어 꾀병으로 사흘이나 결석한 전례가 있었다.
내 인생을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결코 성공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으나 내겐 풍요로운 유년의 추억 창고가 있다. 오래 전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땐 사교육도 없었고 학교에서 받는 교육이 전부였다. 수업시간 외에는 온 세상이 놀이터가 된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은 고무줄 놀이, 말타기, 구슬치기, 숨바꼭질, 땅따먹기 등 노는 아이들로 바글거렸다.
수업 끝나고 집으로 오면서 냇가에서 놀다 자라를 보고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 늦가을 남의 집 무를 뽑아 먹다 주인에게 들켜 손들고 벌 섰던 기억, 누런 밀밭 사잇길을 한참 돌아 강에 가서 조개잡던 기억, 한겨울 오빠들 따라 둠벙에서 얼음타던 기억…. 우리에게 학교공부는 부수적인 문제였고 노는 게 일이었다. 놀이가 곧 공부였다. 어릴 적 이런 풍성한 경험들이 삶에 큰 자양분이 되는 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어린이에게 세상은 온통 호기심 천국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선행학습이다 뭐다 해서 학원으로 내몰고 책상에 잡아두려 하고 있다. 어른들은 동심의 순수함에서 우러나오는 유희의 즐거움을 묵살하고 출세나 성공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킨다. 왜 아이들은 억지로 학원에 가서 국·영·수에 매진하고 오로지 일류대학만 바라보는가. 왜 재미없는 공부를 하고 대학의 낭만이나 비판적 지성도 즐기지 못하면서 취업하기 위한 스펙에 목을 매야 하나. 이런 어른들에게 멍든 동심들은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분노를 증명한다.
진보교육감들이 아이들의 감옥같은 생활을 보다 못해 ‘어린이 놀이헌장’을 선포한 지 1년이 됐다. 아이들에게 ‘돈의 맛’이 아닌 ‘놀이의 맛’을 알려줘 창의성을 키우자는 취지에서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강에서 플라잉 낚시를 하면서 갈등을 푸는 황홀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허나 위를 향한 욕망의 고리가 고착화된 사회 시스템에서 지속가능할 지 의문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는 문화는 놀이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잘 놀 줄 아는 사회가 수준높은 문화의 척도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노래와 춤, 그림과 시 같은 문화와 예술은 사실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태동한 것들이다. 바람과 햇볕 아래서 흙을 주무르는 아이들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나라의 큰 일 하시는 ‘얼라들’과 학부모의 인식이 바뀌어야 가능하다. 어린이날을 맞아 해 본 생각이다.
우난순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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