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신 홍성 내포초 교사 |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웃음소리, 늦은 밤 피곤하기도 할 텐데 웃음소리가 활기 넘친다.
“우리 졸업장에는 금테 둘러야 해.”
“그러게, 우리 사년동안 참 많은 걸 해냈네. 히히.”
나는 몸치다. 늘 체육시간은 나에게 공포와 부끄러움을 주었다. 이런 내가 교대에 갔다. 전 교과를 가르쳐야 하는 초등의 여건 상 예상했던 일이지만 체육시간의 고통은 계속 이어졌다. 뜀틀시간, 넘기도 버거운 뜀틀에서 앞구르기를 한다. 두려움에 뜀틀 앞에서 멈췄던 친구들이 이제는 능숙하게 뜀틀에서 구르기를 한다.
내 차례가 되었다. 뜀틀을 향해 뛰긴 하지만 그 앞에서 멈추기를 여러 번, 이번에 넘지 못하면 재수강이기에 뜀틀 앞에서 눈을 꼭 감았다. 내 몸이 뜀틀에 있긴 한데 넘어가질 않는다. 이렇게 뜀틀에 머리를 박고 한참이 흐른 후에 몸이 서서히 넘어갔다. 순간의 찰나였겠지만 나에겐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때 들려오는 교수님의 목소리.
“김유신, 내년에 또 보는 줄 알았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 학생들이 체육관 벽에 매달려 배구공과 씨름을 한다. 체육관 벽에 그려져 있는 네모난 칸에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30개를 패스해야 통과되는 평가로 공과 씨름하고 나면 어느새 손목에 파란 점들이 생긴다. 아무리 연습해도 10개 이상을 넘기지 못하던 내가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30개를 넘겼다.
그 때 또 들려오는 교수님의 목소리.
“김유신, 내년에 또 보는 줄 알았다.”
수영평가가 있던 날, 25m 수영장 끝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목욕탕에서 놀던 것이 전부인 나에게 수영은 지금까지의 어떤 과정보다 큰 재난이었다. 친구들이 힘차게 발길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반쯤가다 포기한 친구들은 죽다 살아난 듯 옆으로 빠지고 완주한 친구들은 씩씩하게 교수님께 향한다.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던 친구들, 아마 부러움에 더 반짝여 보였을 것이다. 내 차례가 되어 머리를 물에 넣고 발길질을 시작했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을 쉬면 몸이 균형을 잃을 것 같았다. 안되겠다. 그냥 끝까지 가보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내가 교수님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 밖에는.
“교육학과 12번 김유신, 완주했습니다.”
체육만이 나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아니다.
오르간 반주시험, 음악으로 먹고 살 것도 아닌데 피아노학원은 뭐 하러 다니느냐고 주산학원을 끊어주신 아버지 덕에 음악평가가 있는 때이면 새벽에 등교를 해야 했다. 음악관의 오르간이 학생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에 연습을 위해서는 동 트기 전에 오르간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 공포의 국어과 수필시간, 이야기의 내용, 문단의 구성, 서필 까지 모두 통과해야 재수강을 면하게 해주시는 교수님 덕에 몇몇 친구들은 교과서에 미농지를 대고 글자 하나하나 본뜨고, 수필에 그대로 베껴 쓰는 노력을 한 적도 있다.
마지막 관문이었던 임용고시를 앞두고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자취방으로 향하던 나와 친구들이 했던 금테 두른 졸업장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서로 대견해하며 마지막 관문인 임용고시까지 마치고 교단에 들어선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즐겁고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속상한 일, 힘든 일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1996년 겨울날 친구들과의 추억이다. 농담처럼 한 얘기였지만 그 기억이 가끔은 날 지탱해 준다.
스승의 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지금, 선생님들이 옛 추억의 그림자 속에서 잠시 쉬어 가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본다.
김유신 홍성 내포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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