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겨울
거리는 회색빛.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드디어 도쿄에 도착했다. 허름하지만 단정한 옷매무새. 꽤 쌀쌀한 날씨, 목 끝까지 옷을 여미며 이중교로 향한다. 밀려오는 어둠에 주변은 고요해지고 '고쿄'(황거)를 지키는 경비는 곧게 선 자세로 문을 지키고 있다. 저 사이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던져야 할 텐데. 설령 실패한다 해도 두렵지 않다. 이곳까지 왔으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할 뿐. 수많은 생각이 스쳐가지만 그래도 나는 간다. 한 맺힌 조국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줄 수 있다면.#2016년 봄
눈부실 만큼 화창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맑은 도쿄. 정원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황거(皇居) 앞 수천 평의 땅에는 흘깃 보아도 최상품 소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니쥬바시마에 역 B2번 출구에서 나와 10여분 걸었을까. 높은 성벽과 초록숲이 보인다. 이곳이 도쿄의 허브라 불리는 일왕이 살고 있는 고쿄. 조금씩 다가갈수록 마음이 왜 이럴까. 두근두근 뛰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 그래, 이곳에서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던졌구나.▲정면에서 바라본 니쥬바시. 뒤로는 일왕의 거주지인 황거. |
그의 품에는 폭탄 세 개. 나는 카메라 한 대. 그는 천황을 죽이러 그곳에 갔고, 나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 이곳에 왔다. 무려 92년만의 재현이라 한다면 무리가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1924년 의열단 김지섭 의사처럼 굳은 의지를 품고 도쿄로 향했다.
황거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겁다. 내가 만나러 온 것은 작은 다리 하나지만 저 다리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눈물과 한이 서려있다. 주로 패키지 여행차 일본을 찾은 해외 관광객들이 많았다. 더러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조선의 독립투사가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을 혹여나, 알고 있을까?
사진과 구글 지도로만 보았던 니쥬바시 다리가 내 눈앞에 있다. 다리 아치 모양이 안경을 닮았다 해서 ‘메가네바시’ 혹은 ‘이중교’라 부른다. 황거 전체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건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리는 필수다. 성벽은 상당히 높다.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천황을 지키려는 충성심으로 쌓은 성벽 위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만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나무를 빼곡하게 심어 그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설계한 의도성이 다분한 건축설계다. 이곳이 바로 천황의 철옹성. 결코 폭탄 세 개로는 무너뜨릴 수는 없어 보인다. 김지섭 의사도 황거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인지했을까.
의열단 소속의 김지섭 의사는 천황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도쿄로 향했고, 니쥬바시에서 폭탄 세 개를 던졌지만 불발되어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후 구속 수감되어 일본 경찰에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선포하라며 강력하게 주장한다. 3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1927년 사망한다. 김지섭의 이중교 폭파시도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천황을 제거하겠다는 목표,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대형사건이었다. 폭탄 투하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 천황은 물론 동경 시가지는 충격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경찰 수뇌부가 모두 물러났고,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확실히 전달했다.
▲의열단 소속의 김지섭 의사. 강인한 항일의식으로 일왕이 사는 황거에 폭탄 투하를 시도했다. |
홀로 적장에 온 듯 외롭고 두려웠다
이중교는 황거로 들어가는 문과 연결되는 다리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고, 자료에 의하면 일왕도 이곳을 걸어서는 들어가지 않는다(황거는 미리 예약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 관광시에는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간다). 두 명의 문지기가 교대로 다리 앞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폭탄을 던지려 했던 김지섭 의사는 얼마나 강심장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이중교를 품은 다리 너머의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이 전부는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홀로 폭탄을 품고 왔을 김지섭 의사의 비통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홀로 적장에 들어온 듯 나는 외로워졌고 두려웠고 이곳에 모두가 화살과 칼을 든 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무심하게 혹은 황홀한 표정으로 니쥬바시를 핸드폰에 담고 있는 해외 또는 현지 관광객들의 일반적인 감상법에 슬쩍 분노가 느껴졌다.
▲구글지도로 본 상공에서의 황거 모습. 도쿄의 허파답게 나무가 상당히 많이 심어져 있다. |
천황이라 부르는 일왕은 일본인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였다. 현재는 모든 권한을 총리가 대신하고 일왕은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았지만 여전히 일본 통합의 상징으로 왕실의 권위만큼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일본 황거는 400년 전 지어졌고 130년 전부터는 일왕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1924년은 다이쇼 천황이 지배하던 시기였다(천황은 고유대명사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 후 신격화를 벗고 인간임을 선언하며 일왕으로 표현한다). 다이쇼 천황은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이력이 있고 고종과 일곱 번째 왕자 이은을 만나기도 했다. 다이쇼 천황은 이때 이은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이후 적극적으로 조선말을 공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정치적인 감각이 부족해 신하들의 충성을 받지 못했고 병약해 말년에는 아들이 섭정을 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여기에 조선의 독립투사가 자신을 죽이겠다며 황거로 들어오는 다리에 폭탄을 던졌으니, 그 유약한 마음이 요통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서는 길, 내 나라의 아픔은 아물지 않았는데
의열단답게 일본의 수도, 그것도 황거에서 강인한 역사를 남긴 김지섭. 그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하자면 김지섭 열사가 순국하기 한해전인 1926년 12월 다이쇼 천황이 사망한다. 본인이 품고 갔던 폭탄으로 이뤄낸 성과는 아니었지만, 천황이 먼저 눈을 감았다는 것에 그는 안도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 그의 아들인 쇼와 천황이 집권하며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지만 다이쇼 시대가 저무는 모습을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니쥬바시, 또는 이중교, 메가네바시라고도 부른다. |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잔잔한 물결들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여전히 아물지 않은 내 나라의 애환이 더욱 뼈아프다. 일제는 40년간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치욕의 역사를 남겼다. 안타까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갔던 징용병들, 칼과 총에 찢긴 젊은 청춘들, 또 이름 없이 사라져간 우리 민족들… 어찌 잊을까. 이곳에 아무리 한그루에 1억원이 넘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해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으로는 지난 시간을 가릴 수는 없는 일 아닐까.
잔잔한 저 물결은 다 보았겠지. 수십 년을 돌고 돌면서 물그림자는 지우고 또 지웠겠지. 역사도 지우고, 민족의 혼도 지워버리는 암흑 같은 저 연못. 열리지 않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니쥬바시 다리 앞에 서서 마음을 다 잡아 본다. 위안부 피해자 협상, 독도분쟁 등… 김지섭 열사가 품었던 세 개의 폭탄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과거다. 큰 숙제를 안고 니쥬바시에서 돌아섰다. 봄날이었지만 마음은 1924년의 겨울처럼 시리고 추웠다. /이해미 기자
[대한人] 나라를 위해 온전히 나를 버렸다 김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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