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건양대 총장 |
원래 '서기'는 조직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사무원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기'는 관공서에서 가장 낮은 9급 공무원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 서기라는 직급명의 역사는 길다. 조선 고종 때인 1894년 갑신정변 후 대대적인 관제개혁에서 생기게 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때도 계속 존속되었으며, 정부수립 후 1948년 11월 '인사사무처리규정'에 의해 최일선에서 국민들을 접하는 직책으로 서기라는 직급이 명명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당 및 관공서, 기업체 등 조직의 책임자를 가장 낮은 계급의 칭호로 부르게 된 전통은 마르크스ㆍ엥겔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초기 공산주의의 정신은 책임자가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국민을 섬기며 봉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소련 시절 우리 귀에 낯익은 최고지도자 브레즈네프도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서기장으로 불렸다. 고르바초프도 처음에는 서기장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소련을 해체시킨 새 헌법 후에 대통령 타이틀을 붙이게 되었다.
맹자는 “어진 정치는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서기는 바로 민의(民意)와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즉, 민의를 가장 최일선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직의 최고지도자가 서기가 된다는 것은 솔선수범이자 민의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서기는 정부의 각급 기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일반 기업체에서도 사장 직함으로 총경리(總經理)보다 서기를 사용하는 것도 그같은 이유에서다. 앞에 말한 것처럼 중국공산당 중앙기율위가 내린 공문에 “시장경제의 발전으로 당무와 행정 직무를 겸하는 자들이 초심을 잃고 자신을 '관리자' 또는 '경영자'로 착각하고 있다”고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는 것은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부터 국민에 군림하려들지 말고 민의와의 경계에 제대로 서서, 그것들을 제대로 파악하려 애썼느냐는 질책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중국 당중앙기율위의 “서기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중국의 각급 기관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내리는 엄중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추한 모습으로 일그러져가는 당간부들에게 본래 출발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시진핑 총서기'의 의중이 실린 것이다.
이같은 중국에서의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재다짐 움직임은 이제 막 금뺏지를 달게 된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생각해볼 때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엄청난 특권'을 갖게 되는 그들에게 “국회의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일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민 뜻의 대리인”이라고 '현답(賢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금배지를 달게 될 때까지 무수히 되뇌었던 말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국초 1대부터 지난 19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투표를 해온 입장에서 그처럼 당연한 역할을 제대로 해온 국회의원이 있었는지를 필자는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 국민보다는 자신을 위하고 국가 백년대계보다는 자파의 이익을 위하여 철면피같이 움직이는 '그들'만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선거과정에서 수많은 후보자들로부터 국민의 서기가 되어 경계에서 일하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들어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장 낮은 경계선상에서 국민을 생각하며 일하는,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그런 '서기'같은 정치인을 단 한 명이라도 만나게 되길 또다시 기대해본다.
김희수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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