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영환 대전목동초 교장 |
1979년 5월 1일, 내가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보령군 낙동초등학교에 첫 부임한 날이다. 40대 중반의 선배 선생님은 감히 내가 올려다 볼 수조차 없는 하늘같은 존재였다.
“차 선생! 나랑 함께 할 일이 있는데…” 하시며 스카우트 지도자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다. 햇병아리 교사의 잔뜩 긴장 속에 시작된 학교생활이었던지라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멋모르고 시작된 스카우트 지도자의 길은 오늘에 까지 이어져 이제는 내 인생에서 스카우트 지도자란 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내 삶의 분신이 되어버렸다.
당시 스카우트 지도자란 후배 교사가 생기면 바로 물려주려는 짧은 기간 동안의 기피업무 중의 하나였다.
나 역시 당시에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업무는 아니었다.
대원들과 함께 자연을 무대삼아 꿈의 날개를 펼치다 보니 그 매력 속으로 점점 푹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각종 지도자 훈련의 강사로 30여년간 열심히 봉사하며 지도자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전연맹의 치프커미셔너라는 직함을 얻게 되었고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4년째 봉사를 하고 있다.
25년 전의 일이다. 1991년 여름 강원도 고성에서의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는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매우 뜻깊은 행사였다. 불과 3년 전에 개최된 사상 최대 규모의 88서울올림픽에 이어, 그와 버금가는 또 한번의 매머드급 국제청소년 행사가 대규모 잔치로 벌어진 것이다.
이 세계잼버리대회는 전 세계 133개국 2만 여명의 세계청소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8박 9일간 '세계는 하나'라는 주제로 대자연속의 야영생활을 통해 심신의 조화있는 발전을 도모하고 우의를 증진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청소년 한마당 축제로 벌어진 국제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 내가 맡은 버켄헤드 분단 급식반장의 역할은 그야말로 잠과의 전쟁이었다. 새벽 3시 30분 기상! 4시에 중앙본부 급식차량으로부터 1000여명 분의 급식재료를 배급받아 분류한 뒤, 5시부터 각 대별로 분배를 하고나면 동이 트는 6시가 된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8박 9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나서야 '참다운 봉사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큰 보람을 느끼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3박 4일간의 지도자 기본훈련과정과 6박 7일간의 상급훈련과정 강사로 봉사를 마치자마자 이틀 뒤 바로 이어진 것이 이 8박 9일간 세계잼버리 운영요원으로의 봉사였다. 물론 수고비는 고사하고 오히려 참가비를 내고 하는 봉사였기에 더욱 뜻깊었다. 이때 떠올랐던 것이 바로 '에드가 게스트'가 지은 '스카우트 대장'이란 시였다.
'보수나 대가도 없이 거저 봉사하는 그대, 함께 오솔길을 걷던 소년들은 그대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누가 이 위대한 보수, 금을 캐내는 것보다 더 값비싸다는 걸 아랴? 소년들의 구릿빛 얼굴을 보라! 거기 그대에게 주어질 보수가 그려져 있다.'(이하 생략)
이제와 생각해 보면 37년 전 그 선배 선생님의 스카우트 지도자로의 인도가 없었다면 나의 교직생활은 얼마나 무기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에는 참다운 봉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 그 분께 감사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최**선생님! 고맙습니다.'
차영환 대전목동초 교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