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동요부르기를 활성화시키려고 시작했다는 프로그램, 어른 패널들과 함께 팀을 나눠 어린이들이 노래 경쟁을 한다. 나이도 조금씩 다르고, 노래 실력도 약간씩 차이가 난다. 그러다보니 경쟁의 결과로 인해 안쓰러운 느낌이 드는 게 불편해서 한번 보고 말았었는데, 채널을 돌리다가 딱 좋은 타이밍에 진한 감동을 얻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은 프로그램 초반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끈 유망주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음악선생님이어서 어릴 때부터 음악과 더불어 자랐고, 타고난 감각으로 작곡도 작사도 가능하고, 일상적인 말이나 인사도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한다는 소년. 노래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아이. 사람들은 소년의 눈물을 경쟁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중간에 울지 않고 끝까지 노래를 마치다니 대단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고 듣기에는 그런 정도의 설명이나 중간 중간 점수판이 차오를 때 마다 터지는 청중들의 함성은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인 소년의 격을 높여주기에는 부족했다.
한마디로 아홉 살 소년이 90살이나 먹은 동요와 소통하는 몇 분이었다. 2절에 실제 자기 고향의 봄을 담은 소년은 “…내가 사는 제주에 봄이 오면은 돌담 사이 봄바람 청보리 물결 한라산에 활짝 핀 철쭉길 따라 우리 엄마 손잡고 걸어갑니다” 라고 노래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한다고 해서 그런 감동이 일지는 않는다. 소년이 그리움을 알고 노래하니까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년이 무어 그렇게 그리울 게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담 사이 봄바람도 느껴보고, 청보리 물결도 보고, 활짝핀 철쭉길 따라 엄마랑 손잡고 걸어본 아이라면 그리움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의 노래에 어린이 청중도 울고 어른 청중도 울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어린이 자아상태(child ego state)가 기억하는 느낌,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함께 했던 시간속에서 느꼈던 즐거움, 기쁨, 자랑스러움, 미안함, 부끄러움 등 어린 시절 경험한 이런저런 느낌들이 그리움의 눈물샘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이다. 언뜻 부족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달이 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리움이 있기에 우리는 반가움도 느낄 수 있고 행복감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움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꿈도 꿀 수 있고 소망도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정보화 사회, IT 강국, 대한민국에서는 미처 그리울 새가 없다. 생각나면 바로 카톡하고 보고 싶으면 즉시 영상 통화하고 참을 필요도 없고 견딜 이유도 없다. 밤이고 낮이고 마음 내키는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통신을 시도한다. 그러다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행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유가 없다. 아니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펑펑 터지는 이즈음, 그리움을 핑계로 잠시 멈춰서는 시간을 갖자. 활짝 만개해버린 봄꽃무리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라도 좋으니 그 안에 빠져들어보자.
이미 감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 막막하고 잘 되지 않걸랑, 고향의 봄을 들어보자, 아홉 살 소년이 부르는 90살의 동요를. 유년시절의 따스한 손길이 다정하게 손내밀며 한 차례 마음자리를 돌고는 코 끝 찡한 그리움으로 꽃잎처럼 흩날릴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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