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
나이도, 생김새도 비슷한 데다 증상도 똑같으니 얼굴만 보고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탈진되어 입원한 아이들을 수액과 전해질 요법으로 회복시키면서 2박 3일, 혹은 3박 4일 간 치료하니 입·퇴원이 잦아 더욱 구별이 어려웠다.
입원 첫날 굶긴 다음 회복되면 물, 미음, 죽의 순서로 음식을 올리고 잘 견디면 퇴원하는 아이들에게 누구를 굶기고 누구에게 죽을 줄 것인지를 기록을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었다. 부지런만 떨면 치료에 문제는 없었는데, 진짜 문제는 주치의인 김교수님이 아이들과 치료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회진 중에 아이의 하루를 보고하는 임무를 띤 내가 기록을 확인하느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교수님이 바로 아기엄마에게 다가가 '죽 먹고 설사 어땠어요?' 하고 물어보시니 내 마음은 시쳇말로 '죽을 맛'이었다.
나는 김교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외래진료하고 병원장으로 행정까지 보면서 하루 종일 입원환자만 본 나보다 하루에 딱 두 번 만나는 아이의 상태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데에다 '00야 기침 좀 어떠니?' 이런 식으로 병원 복도에서 만나는 환자의 이름을 '마구' 불러 대시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김교수님과 같은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5년 후 서울의 종합병원 소아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로타바이러스 장염이 다시 엄청나게 돌아서 40여명의 환자가 입원했고,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쯤 지나자 '원장님은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하신다면서요?' 하는 인사를 가끔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은사님 발뒤꿈치는 따라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경륜'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가까운 미래에 현재 직업의 50%가 사라질 것이며, 미래의 직업 중 65%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일 것이라는 무서운 괴담과 같은 얘기들이 SNS상에 돌고 있다. 이세돌 사범과 알파고의 대결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계에 지배당하는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미래가 반드시 어두운 것만은 아닐 것이고, 그리고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고바야시 다다아키라는 사람이 쓴 지속하는 힘이라는 책이 나왔다. 좋아하는 일을 찾느라 인생을 방황하지 말고 한 가지 일에 매진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내용이다. 하다못해 팔굽혀펴기 다섯 번이라도 매일 수십 년 지속하면 그 성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나에게 맞는 일과 재능을 찾지 못했다고 낙망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당장 시작하라고 그 책은 얘기한다.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권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능률도 오르고 성공하기도 더 쉽다고 얘기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직업이 같다면 참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젊은이보다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나는 죽어도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작은 기회라도 붙잡고 열심히 한다면 언젠가는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보자. 매일매일은 같을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발전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자.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의 분야에서 달인이 될 수 있다. 다만 공짜로 얻어지는 성과는 없다. 다만 '지속하는 힘'을 믿고 매진한다면 미래가 반드시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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