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동주,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한여름 오후의 나른함에 취해 있던 고3 국어시간. 국어 선생님은 갑자기 윤동주의 ‘서시’를 열정적으로 읊더니 책상을 탕 치며 일갈했다. 윤동주는 20을 갓 넘은 나이에 이런 시를 썼단 말이다, 너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냐….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제임스 딘, 이용, 조용필 그리고 ‘서시’. 80년대 책받침이나 연습장 표지에 으레 등장하는 메뉴였다. 누구나 알고 있고 암송하고 좋아했던 윤동주의 ‘서시’. 그 시의 깊이를 온전히 알 순 없었으나 뭔가 가슴 뭉클하는 게 있었다. 거기다 일제 치하의 시대상황까지 가미된 저항시 ‘서시’는 청소년들의 가슴에 시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대표적인 시였다.
#시인은 자기만의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정병욱이 보관해온 윤동주의 서시 자필 원고 |
예수가 민중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듯, 석가모니가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듯이 시인은 구도자의 행로를 걷는 운명을 타고났다. 오로지 시만이 구원의 장소라고 말해지는 이유를 데카르트는 “시인은 부싯돌 안의 불의 씨앗을 끄집어내는, 그 불의 씨앗들을 더욱 찬연히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랭보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온갖 형식의 사랑, 괴로움, 광기. 시인은 스스로를 찾고, 자기자신 속의 모든 독을 다 써서 그 정수만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신념을 다하고, 초인적인 능력을 다해야 하는… 시인은 ‘미지’에 도달하는 것이니까요.”
글쓰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모든 환경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문학의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 순정한 글쓰기가 가능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긍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불행히도 시인을 불편해 하는 시대에 살았다. 억압의 광기가 요동치는 시대에 자기만의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인이 독재자에겐 얼마나 거북한 존재로 보였을까. 조잡하고 남루한 시대에 시를 쓰려면 냉철한 지성과 꺾이지 않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가 쓴 한편의 시를 읽어보자.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관리가 우겨 대니//나는 잠이 깰 수 밖에‘. ‘김일성만세’라는 이 시는 김수영이 1960년에 쓴 시다. 당시 장면 정권은 4.19혁명 직후 등장했다. 김수영은 장면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체제의 억압에 굴복해선 안된다. 체제가 허용한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를 따르는 순간 우리는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체제의 길들임에 과감히 뛰어든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정주다. 공공연한 친일 행각과 독재 정권의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서정주.
#일제 하, 달리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의 부끄러움
▲ 영화='동주' |
아도르노가 “분단과 독재의 시대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한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시대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예술, 시의 문제는 양심이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지난한 암중모색의 와중에 세계를 인식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잊혀지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 있다. 아니, 시의 형식을 띤 단 몇줄의 소설이어서 차라리 시라고 해야 옳다. 제목도, 작가도 모른다. 다만 독일의 작가가 썼다는 것만 알뿐. 내용은 이렇다. 2차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군인이 늦은밤 거리에서 창녀를 만난다. 창녀가 그 군인에게 추파를 던지자 창녀를 본 군인이 가로등 불빛아래로 그녀를 데려간다. “요한!” 군인은 창녀의 남편이었다.
나는 지금 윤동주의 시 ‘참회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쓰길 바라고, 시인이 되길 원했던 게 부끄러워”하다 스물여덟의 생을 마감했던 시인 윤동주. 식민지 시인들의 경우처럼 윤동주 역시 정신의 결벽성과 처절한 죽음의 비극성으로 인해 감히 범접할 수 없고 절대 순수의 신화를 거느려왔던 게 사실이다.
흑백영화 속 윤동주는 더이상 해사한 얼굴과 한없이 다감해 보이는 감수성과 아름다운 시로 박제된 시인이 아니었다. 일제 치하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친구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열등감에 대해, 그럼에도 달리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눈물을 훔치는 옆자리의 나이 지긋한 부인을 보고 나 또한 부끄러웠다. 졸음에 못이겨 깜빡 존 사이 손에 쥐고 있던 장갑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부끄럽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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