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창단된 한화 이글스의 역사적 순간들. 사진=한화이글스 제공 |
2015년 한화 이글스만큼 뜨거웠던 팀이 있었을까. 오죽하면 중독성 강한 마리화나를 비유해 마리한화로 불렸을까. 만년꼴지팀이 한국야구를 뒤흔들었다. 전국은 야구열풍이 불었고 한밭야구장 입장권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분명 2014시즌과는 달랐다.
아쉬움은 기대감으로 한탄은 감탄이 되어 가을야구를 향한 열망을 들끓게 만들었다. 야신 김성근 감독 영입은 ‘신의 한수’였다. 나락의 끝에서 만난 동아줄처럼 진정한 야구의 신을 만나 한화 이글스는 부활의 날개를 곧게 폈다.
한화 이글스의 역사는 무려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된 이후 대전과 충청을 연고로 한 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한화그룹(그 당시에는 한국화약)과 동아건설이 가장 유력한 창단 대결구도를 형성했지만 KBO협회와 이미 창단된 6개 팀의 구단 승인 조건이 까다로웠다.
협상은 1년 넘게 계속됐고 결국 동아건설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홀로남은 한국화약은 포기하지 않고 협상을 지속했고, 서울 강남 도곡동에 30억 상당의 야구협회 건물을 지어주는 조건이 성사됐다. 1985년 리그 참가는 무산됐지만 한 해 동안 창단준비와 2군리그로 전력을 다져 1986년부터 1부리그에 참여하기로 했다.
30년 전 오늘은 1986년 3월8일 ‘빙그레 이글스’가 야구 한국시리즈에 등판했던 역사적인 날이다(출범일은 1985년 3월11일). 이날 창단식을 갖고 대전충청의 야구아들로 터를 잡았다. 같은 해 4월1일은 대전구장에서는 빙그레의 첫 경기가 열렸다.
‘어게인 1999’ 가자 이글스
1986년 첫 시즌 경험부족과 플레이 미숙으로 최하위 기록을 냈다. 이미 프로팀으로 활약하는 상대팀들에게 빙그레는 신생팀이었을 뿐.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글스의 진가는 1988년부터 드러났다. 창단 2년 만에 리그 2위로 올라서며 아기 독수리에서 청년의 독수리로 급성장했던 것. 이후 매 시즌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주며 비상을 꿈꿨다.
▲왼쪽부터 장종훈, 정민철, 송진우 선수. 세사람의 등번호는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사진=중도일보 DB |
그러나 시련도 있는 법. 계속된 우승 좌절로 선수들은 부상과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주요 선수들마저 이적하는 등 마운드의 공백이 발생했다. 결국, 한화그룹은 ‘변화’를 통해 반전을 극약처방으로 내린다. 팀 이름을 그룹이름인 한화로 변경했고 감독과 코치진, CI까지 모두 교체했다. 그러나 대전충청이라는 연고만은 굳건했다.
드디어 영광의 순간이 한화 이글스에 날아들었다. 때는 1999년, 정규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두산을, 한국시리즈에서는 롯데를 물리치며 창단 14년 만에 첫 우승을 이뤄냈다. 송진우와 구대성, 정민철과 장종훈, 백재호, 송지만… 신구조화가 이뤄낸 대전충청 야구역사의 절정의 순간이었다.
이후 한화 이글스는 긴 암흑기 끝에 2016년 시즌을 앞두고 있다. 창단부터 10명의 감독이 이글스를 지휘했고 한화의 역사가 된 장종훈 35번, 정민철 23번, 송진우 21번은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현재 영구결번 3개를 갖고 있으며 KBO 최다 기록을 가진 팀도 한화 이글스다.
어느새 창단 31년. 아기독수리에서 청년독수리로 이제는 마운드를 지배 할 노련한 독수리로 성장했다. 빙그레에서 한화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옛 영광의 날은 대전충청민의 가슴에 남아있다. 사실 한화 이글스의 팬들은 ‘어게인 1999’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작년 보여줬던 마리한화라면 올해 가능성 있지 않을까?
올 시즌 거침없이 달려 가을야구에 세이프 되기를…. 31살, 한화 이글스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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