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애국지사는 1859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4세에 남편 김순영과 결혼해 아들 김구 선생을 두었다.1910년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고 남편이 죽자 집 바느질과 가정부일로 김구 선생을 뒷바라지하며 강한 신념과 저항정신을 가르쳤다.
김구 선생을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이동한 후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폭탄 투하 의거를 펼쳐 독립자금이 들어오자 단체에서 안살림을 맡아 자금을 관리했다.
김구 선생이 환갑잔치를 열려하자 시국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에도 자신의 생일에 쓰일 돈을 독립군 무기기구입자금으로 돌려 나라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곽 애국지사는 광복을 5년 남겨두고 김구 선생에게 “난 먼저 가서 애통하게도 내 눈으로 독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네가 눈으로 봐주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중국 충칭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곽 애국지사의 공훈을 인정해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현재 곽 애국지사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송익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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