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갑종 백석대 총장 |
이처럼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크고 작은 일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매일 일어나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일들에 면역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매일 매일의 생존 자체가 어렵기 때문인지 무관심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들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있는 이상 옳은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위기는 전 국민의 안전과 생존권 자체에도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97주년 3·1절 기념일 도래와 함께 3·1절 운동의 꽃이며, 나라사랑의 사표(師表)인 유관순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관순이 오늘 살아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 했을까?
유관순은 일본제국이 청일전쟁(1894~1895)에 승리한 후 우리나라를 강압적으로 찬탈하기 위한 절차를 점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3남 2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있었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후 고종의 왕권을 강탈했으며,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통치가 시작된 점을 고려해 볼 때, 유관순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하(風前燈下) 시에 출생하여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어려운 기간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유관순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졌고, 유관순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신앙가운데서 성장했다. 숙부가 선교사로 일하는 고향땅 지령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이 자랐고,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렀던 샤프(Alise H. Sharp) 선교사 부인을 통해 기독교서적은 물론 당시 발간된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다르크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애국애족에 대한 꿈과 열정을 키워갈 수 있었다. 1916년 샤프 선교사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의 전신)에 교비학생으로 입학했다. 이화학당에 다니게 되면서 유관순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확실하게 배우게 된 것 같다. 유관순은 매일 오전에 있었던 학교채플과 성경공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밤중과 새벽에 홀로 기도실에 들어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열정어린 눈물의 기도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확산을 위해 조직된 이화학당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과 3월 5일의 서울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휴교령으로 귀향할 때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 아우네 만세운동을 주도했였다. 유관순은 병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중에도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느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유관순은 경성법원으로부터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같이 투옥된 우국지사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속했고, 이로 인해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순국했다.
돌이켜 보면 3·1운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에 대한 한국 민족의 민족적 저항운동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권확보를 위한 비폭력운동이었다. 이토록 목숨까지 던지면서 실천한 유관순의 나라사랑은 우리가 당면한 위기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귀중한 자산이자 본 받아야 할 정신이 아닐까.
이글의 집필을 위해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가 발간한 『유관순의 생애와 3.1 운동』 (2014)을 참조했습니다.
최갑종 백석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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