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義士)와 열사(烈士)의 차이를 아십니까?
국가보훈처의 의하면 의사는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말하고 열사는 맨몸으로 저항하여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안창호, 윤봉길은 ‘의사’ 유관순은 ‘열사’로 표기하죠. 용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열사와 의사 모두 일본에 맞서 저항했고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는 점에서 의미의 본질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훈장의 종류는 아십니까?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은 무궁화대훈장. 이는 대통령 및 배우자에게만 수여되는 훈장입니다. 두번째는 건국훈장, 다섯등급으로 나뉘는데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죠. 이밖에도 국민훈장, 무공훈장, 근정훈장, 보훈훈장, 수교훈장, 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문화훈장, 체육훈장, 과학기술훈장 등 총 12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독립 ‘의사’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추강(秋岡) 김지섭입니다.
▲1927년 2월20일 순국한 김지섭 의사 |
▲강직한 성품, 의열단
188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여 천재로 불리었습니다. 일본어를 2개월 만에 습득할 만큼 똑똑했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품성을 갖고 있었다 합니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품성이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는 씨앗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김지섭은 15때 혼인했고, 21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 교원이 되었지만 1910년 일제의 강압이 시작되자 돌연 공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때부터 김원봉, 곽재기, 기시현 등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하지요.
김지섭은 이미 옥고를 치른 형과 때를 기다렸지만 일제치하가 점점 강해지자 결국 조선을 떠나 만주로 망명합니다. 세계를 돌며 조국독립을 모색하던 중 러시아로부터 운동자금을 지원받기로 상의하고 동료들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의열단에 정식으로 가입한 김지섭은 대규모 폭탄 의거를 추진합니다. 총독부 등 일제기관을 파괴시켜야만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 생각한 것이지요. 삼엄한 일제의 눈을 돌려 무사히 폭탄을 국내로 반입은 시켰으나 거사 이틀 전, 일본 경찰에 핵심 단원 3명이 붙잡히고 맙니다. 폭탄의거가 중단되자 김지섭 의사와 김원봉과 장건상은 상해로 건너갑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행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죠. 또 다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부호를 상대로 작업에 착수합니다. 대상은 총독부 판사직에 있던 백윤화. 그의 아버지는 백상회를 운영하는 친일부호였는데, 백 부자 집으로 찾아가 의열단 경고문을 보여주며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합니다. 현금 2천원을 주겠다며 사무실로 찾아오라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백윤화 부자의 계략에 동지 윤병구가 일본경찰에 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폭탄의거 실패, 군자금 확보 실패. 연달아 쓴맛을 본 김지섭은 분노했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 일왕을 제거하자.
▲적의 심장부로 '나쥬바시사건'
김지섭이 일본으로 가야겠다 결심한 시기는 1923년. 그해 9월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죠. 일본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려 한인교포 6000명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열단과 조선인들은 분개하지요.
의열단은 계획 재정비하여 일제의 만행을 되갚을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924년 동경에서 제국의회가 개최돼 일제 총리와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열단 단원들은 다시 한 번 폭탄의거를 다짐합니다. 김지섭은 자신이 이 의거의 적임자라며 단장 김원봉에게 자신을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폭탄 세 개를 품고 일본, 동경으로 향합니다.
일본인으로 위장한 김지섭은 동경으로 가는 배에서 이런 싯귀를 남깁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이 싯구에서 그는 이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직감했던 듯싶습니다. 조국이 아닌 적의 심장부를 향해 폭탄을 싣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비장했을 겁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와신상담의 자세로 임하리. 강단 있고 대쪽 같은 김지섭의 성격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상해에서 일본 안벽까지 열흘. 다시 동경까지 5일이 소요됐습니다. 동경으로 향해 오던 1924년 1월4일 의회가 휴회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비도 동이 났고, 체력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김지섭은 계획을 수정해 일본 왕궁에 폭탄투하라는 최후의 결심합니다.
왕궁 주변을 세밀히 답사합니다. 일비곡과 이중교, 앵전문 등을 둘러본 김지섭은 이중교가 왕궁과 가장 가깝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1924년 1월6일 저녁 이중교로 접근합니다. 밤이 되자 일본 경찰들이 배회하는 김지섭에게 돌아가라 명을 내립니다. 이에 김지섭은 굴하지 않고 폭탄 하나를 투하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발. 이에 이중교 중앙까지 돌진하여 남은 폭탄 2개를 다시 던집니다. 약한 폭음만 터지고는 또다시 불발.
오랜시간과 목숨을 건 폭탄의거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김지섭은 왕궁 근위병에 체포되고 일비곡 경찰서에 구금되고 맙니다.
이 사건은 실로 일본에 큰 충격을 가져다준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왕궁을 한국 독립의사가 폭탄투하를 하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동경 전 시가지가 충격의 도가니였으며 일제 경찰 수뇌부가 경질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볼때 김지섭의 왕궁 폭탄투하는 결코 실패라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사형 아니면 무죄 석방하라
▲김지섭의 옥중편지. 독립기념관 제공 |
김지섭의 강인한 면모는 옥중에서도 계속됩니다. 총독정치의 악랄함을 폭로하며 내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 석방하라 열변을 토합니다. 또 같은해 10월16일 열린 3차 공판에서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영광이다"라며 대답하는 기백을 보여줍니다. 일제는 왕궁 침입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며 사형을 구형했으나 3차 공판 후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김지섭은 1927년 옥사에서 순국합니다. 44세.
김지섭의 일생은 '실패'와 '다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폭탄의거와 군자금 모금, 조국해방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김지섭은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전진했습니다. 그가 순국한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광복을 맞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지요.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은 김지섭 의사 덕분입니다.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김지섭 의사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2월20일 김지섭 의사의 순국일입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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